자유라는 이름의 외통수

선택인가, 협박인가

by 민진성 mola mola

무교의 시선에서 그리스도교의 '자유의지'는 기만적이다. 선택의 자유를 줬다면서 정답을 정해놓고, 그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죄인'이라는 낙인을 찍는다. 이건 자유라기보다 정해진 답을 강요하는 '답정너'식 폭력에 가깝지 않은가.

하지만 이 모순을 이해하기 위해선 '죄'와 '심판'에 대한 관점을 조금 바꿀 필요가 있다.



죄는 '범죄'가 아니라 '상태'다

보통 우리는 죄를 법을 어기는 '행위'로 생각한다. 하지만 신학적 관점에서 죄는 '근원(신)으로부터의 분리' 그 자체다. 쉽게 비유하자면, 태양을 등지고 동굴로 들어가는 행위와 같다. 태양이 "나를 바라보지 않으면 너를 벌하겠다"고 협박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빛을 거부하고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상태 자체가 이미 '추위'와 '어둠'이라는 결과(죄의 상태)를 초래한다는 논리다. 즉, 신의 뜻대로 변하지 않는 것은 신의 명령을 어긴 '괘씸죄'라기보다, 생명의 근원에서 스스로 멀어져 시들어가는 '자연적 결과'라고 보는 셈이다.



자율성의 목적은 '강제된 선'의 거부

신이 인간의 자율성을 존중한다는 말은, 인간이 신을 거부하고 비참해질 권리까지도 인정한다는 뜻이다. 만약 신이 인간을 무조건 선하게만 만들었다면, 그 선함에는 아무런 도덕적 가치가 없다. 우리가 밥솥이 밥을 잘 한다고 해서 밥솥을 '의롭다'고 칭송하지 않는 것과 같다. 인간이 스스로의 의지로 악을 선택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을 향해 한 발짝 내딛는 것, 그 '불완전한 선택'을 신은 인간만이 가진 고유한 존엄성으로 본다.



변하라는 요구는 '회복'의 권유다

"신의 뜻대로 변하라"는 요구는 사실 "원래의 온전한 모습으로 돌아오라"는 권유에 가깝다. 그리스도교는 인간이 본래 신의 형상을 닮은 고결한 존재였으나 지금은 망가진 상태라고 본다. 따라서 변하지 않는 것이 '자유'를 누리는 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본능과 욕망이라는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라고 해석한다. 신의 뜻(사랑, 희생, 절제 등)을 따르는 변화는 자율성을 억압당하는 과정이 아니라, 오히려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해방'의 과정이라는 주장이다.



지독한 역설

결국 이 모든 건 '관계'의 프레임 안에서만 성립한다. 사랑하는 연인 사이에서 한쪽이 계속 마음을 닫고 있다면, 다른 한쪽은 그것을 슬퍼하며 "변해달라"고 애원할 것이다. 그것은 상대의 자율성을 뺏으려는 독재가 아니라, 관계를 지속하고 싶어 하는 간절함이다.

물론, 밖에서 보는 이들에게 이것은 여전히 "내 뜻대로 안 하면 지옥"이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신이 준 '자율성'과 그에 따른 '책임'이라는 두 기둥 사이에서 발생하는 팽팽한 긴장감. 이 모순처럼 보이는 균형이야말로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인간론의 핵심이자, 동시에 세상이 이 종교를 끊임없이 의심하게 만드는 지점이다.




#생각번호20260116




본 글은 RE:Mind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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