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고통은 누구의 것인가
예수의 희생을 보며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아버지가 아들을 사지로 몰아넣고 그 고통을 도구 삼아 메시지를 전한다면, 그 신을 과연 '선하다'고 부를 수 있을까. 이것은 신의 도덕적 결함인가, 아니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내막이 있는가.
이 의문을 풀기 위해 그리스도교는 '삼위일체'라는 복잡한 개념을 꺼내 든다. 성부(신)와 성자(예수)는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다. 즉, 신이 아들이라는 '타인'을 보낸 것이 아니라, 신 자신이 인간의 제약 속으로 직접 들어왔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 신이 구름 위에서 아들의 고통을 구경만 했다면 그것은 도덕적 비난을 피할 수 없겠지만, 신학의 관점에서 십자가의 고통은 아들의 것인 동시에 신 자신의 것이 된다. 결국 이것은 타인을 희생시킨 잔인함이 아니라, 입법자가 자신이 만든 법의 엄격함을 지키기 위해 직접 벌금을 내러 내려온 '자기희생'에 가깝다.
신이 고통을 '활용'했다는 지점은 분명 도덕적으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이를 '활용'이 아닌 '동참'으로 해석한다. 신이 전능한 권력으로 하늘에서 명령만 내린다면, 고통받는 인간은 신을 원망할 수밖에 없다. "당신이 뭘 알아?"라는 항변 앞에서 신은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가 겪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은 신이 인간의 비극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겪는 가장 비참한 밑바닥까지 내려가 그 아픔을 '직접 경험'했음을 증명하는 서사가 된다.
여기서 다시 "왜 하필 그렇게 끔찍한 방식이어야 했나"라는 의문이 남는다. 고대 사회에서 '피'와 '희생'은 생명의 대가를 의미했다. 신학적으로 죄의 대가는 사망(생명의 상실)인데, 신은 이 법칙을 무시하고 "그냥 없던 일로 하자"고 선언하지 않았다. 법칙을 무시하는 신은 정의롭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신은 법칙을 존중하면서도 사랑을 실현하기 위해, 생명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장 처절한 고통과 죽음을 '신 스스로' 감당하는 길을 택했다. 가장 높은 존재가 가장 낮은 고통을 겪음으로써, 어떤 죄인도 그 희생의 범위를 벗어날 수 없게 설계한 것이다.
물론, 무교의 시각에서 보면 이 모든 설명은 여전히 '신이 짠 각본' 속의 연극처럼 보일 수 있다. 전능하다면서 굳이 그런 피비린내 나는 서사를 써야만 했느냐는 비판은 유효하다.
결국 신의 도덕성은 '희생의 진정성'에 달려 있다. 만약 예수와 신이 분리된 존재라면 신은 비도덕적인 폭군이겠지만, 예수의 고통이 곧 신의 찢어지는 마음이자 본인의 고통이었다면 그것은 지독할 만큼 고통스러운 사랑의 증명이 된다.
#생각번호2026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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