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실이라는 이름의 ‘사회적 가스라이팅’
자고 나면 자산 가치가 널뛰는 시대다. 누군가는 몇 년 치 연봉을 단 며칠 만에 벌어들이고, 성실이 최고의 덕목이라 믿었던 이들은 ‘벼락 거지’가 되어 상실감에 빠진다. 노동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현상을 보며 사람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탈피하려 몸부림치지만, 기이하게도 채용 시장과 사회 시스템은 여전히 우리에게 ‘성실’이라는 낡은 명표를 달라고 요구한다. 왜 사회는 이토록 성실에 집착하는 것일까.
사회가 요구하는 성실은 사실 도덕적 가치라기보다 ‘비용 절감’의 문제에 가깝다. 조직을 운영하는 입장에서 가장 두려운 것은 불확실성이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으나 언제 튈지 모르는 사람보다, 적당한 능력을 갖추고 정해진 시간에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관리 비용이 적게 든다. 즉, 사회가 요구하는 성실이란 곧 **‘예측 가능한 존재가 되어달라’**는 신호다. 시스템의 톱니바퀴가 갑자기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는 것, 그것이 자산 가치 폭등의 시대에도 성실이 거래되는 이유다.
자산 시장의 이동 속도는 빛의 속도와 같지만, 사회 시스템의 관성은 거대 화물선처럼 무겁고 느리다. 교육 과정, 근로 기준법, 기업의 성과 지표는 여전히 1차·2차 산업혁명기의 ‘근면’을 기반으로 설계되어 있다.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창의적 노동조차도 결국 일정한 시간 동안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있는 ‘양적인 투입’을 거쳐야만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 관성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이동하려 하지만, 그들을 담는 그릇(사회 구조)은 여전히 과거의 틀을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나 거대 자본의 입장에서 성실은 가장 다루기 쉬운 통제 기제다. 모두가 자산 가치 상승에 올라타 노동 현장을 떠나버린다면 시스템은 붕괴한다. 따라서 사회는 끊임없이 성실의 가치를 미화하고 주입한다. “성실한 자가 결국 승리한다”는 서사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일종의 ‘사회적 가스라이팅’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실질적인 보상은 자산 시장이 주더라도, 심리적인 훈장은 노동 현장에서의 성실에 부여함으로써 인력이 이탈하는 것을 막는 전략이다.
역설적이게도 사회가 성실을 반복 요구하는 마지막 이유는 그것이 가장 공평하게 요구할 수 있는 낮은 문턱이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재능이나 막대한 자본은 모두가 가질 수 없지만, ‘시간을 지키고 주어진 일을 완수하는 성실함’은 이론적으로 누구나 제공할 수 있는 역량이다.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기 가장 쉽고 저렴한 지표가 여전히 성실이라는 점은, 우리가 아무리 패러다임을 바꾸려 해도 사회가 이 낡은 도구를 놓지 못하는 서글픈 이유이기도 하다.
#생각번호2026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