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천장을 인지한다는 것
과거의 성실이 '미덕'이었다면, 오늘날의 성실은 '체념'에 가깝다. 예전에는 열심히 일하면 집을 사고 계층의 사다리를 오를 수 있다는 믿음이 실체적인 희망으로 존재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자산 가치의 폭등과 성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실시간으로 목격하는 대중에게, 매일의 성실한 노동은 목표를 향한 전진이 아니라 제자리걸음을 유지하기 위한 비명 섞인 몸부림이 되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든다.
모를 때는 평온했다. 옆집 사람도, 앞집 사람도 나와 비슷하게 벌고 비슷하게 아끼며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SNS와 매체를 통해 '시스템의 허점'을 이용해 단숨에 운명을 바꾼 이들의 서사가 쏟아진다. 내가 한 달 내내 성실히 일해 버는 돈을 누군가는 단 한 번의 클릭이나 자산의 상승으로 벌어들이는 것을 지켜보는 일. 이 격차를 인지하는 순간, 나의 성실은 가치를 잃고 비참한 '비효율'로 전락한다.
플라톤의 동굴 비유를 빌려오자면, 우리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가 실체인 줄 알고 살던 죄수들이었다. 그런데 우연히 고개를 돌려 동굴 밖의 찬란한 태양(자본 소득,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게 된 것이다. 다시 동굴 벽의 그림자를 보며 성실하게 살아야 하지만, 이미 밖의 세상을 알아버린 눈에 그림자는 더 이상 진실일 수 없다. 대안을 모를 때는 동굴 안의 삶이 운명이었으나, 대안을 아는 순간부터 그 삶은 ‘탈출하지 못한 자의 감옥’이 된다.
"모르는 게 약이다"라는 옛말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잔인한 진실이다. 운명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이 버젓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의 환경, 책임감, 손실에 대한 공포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지 못하는 상태. 이 '인지'와 '행동' 사이의 거대한 간극은 자괴감을 낳는다. 내가 선택한 성실이 사실은 무능함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나를 끊임없이 갉아먹기 때문이다.
결국 지금의 세대는 과거보다 풍요로울지언정 정신적으로는 더 빈곤하다. 가야 할 곳은 저 멀리 보이는데 내 발은 늪에 빠져 움직이지 않는 것을 실시간으로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는 여전히 우리에게 성실을 요구하며 마취제를 놓으려 하지만, 이미 깨어버린 인식은 다시 잠들지 않는다. 어쩌면 현대인의 가장 큰 불행은 '바꿀 수 없는 운명을 너무 잘 이해하고 있다'는 점에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번호20260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