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은 어떻게 형이상학이 되었나
우리는 자연에 '질서'가 있다고 믿는다. 어제의 물리 법칙이 오늘을 지배하고, 내일의 태양을 다시 띄울 것이라는 확신. 이 견고한 믿음 위에서 인류는 문명을 쌓고 미래를 설계해 왔다. 하지만 이 확신의 밑바닥을 들여다보는 순간, 우리는 당혹스러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우리가 이성이라 칭송해 마지않던 과학적 토대가 사실은 증명 불가능한 '믿음'의 영역 위에 위태롭게 서 있다는 사실이다.
데이비드 흄이 던진 '귀납의 문제'는 여전히 유효하다. 수억 번 반복된 과거의 경험이 미래의 필연성을 담보할 수 있을까? 논리적으로 답은 '아니오'다. 과거에 해가 떴다는 사실과 내일 해가 뜰 것이라는 예측 사이에는 어떠한 인과적 필연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우리는 '자연의 일관성'이라는 거대한 전제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뿐이다. 흄의 지적대로, 이것은 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심리적 관습'에 불과하다. 수천 년간 이어진 법칙이 내일 아침 갑자기 전복된다 해도, 논리학의 관점에서 그것은 오류가 아니라 그저 '새로운 사건'일 뿐이다. 결국 질서에 대한 확신은 이성이 도달한 결론이 아니라, 불확실성을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본능적 선택이다.
흔히 과학을 형이상학의 대척점에 둔다. 관념적 망상을 걷어내고 실재를 규명한다는 명분 때문이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과학이야말로 가장 정교하게 설계된 형이상학이다. 과학은 '세상은 규칙적이며 인간은 그것을 이해할 수 있다'는 형이상학적 신념을 엔진 삼아 작동하기 때문이다.
임마누엘 칸트의 통찰을 빌리자면, 우리는 외부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인간 지성이 설계한 '인과성'이라는 틀을 통해 재구성한다. 즉, 자연에 원래 질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질서라는 문법으로 자연을 번역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적 법칙은 객관적 실재라기보다, 인간이 우주를 해석하기 위해 구축한 가장 거대한 '구조적 가설'에 가깝다.
과학이 종교나 미신과 구별되는 지점은 그 견고함이 아니라 오히려 '취약함'에 있다. 칼 포퍼가 강조했듯, 과학은 '반증 가능성'을 먹고 자란다. 내일 당장 법칙이 전복될 수 있다는 공포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열어두고 끊임없이 검증하는 과정 자체가 과학의 본질이다.
따라서 우리가 느끼는 확신은 '불변의 진리'를 발견했기 때문이 아니라, '아직 틀리지 않은 가설'들이 쌓아 올린 통계적 안도감일 뿐이다. 우리는 수천 년의 법칙이 하루아침에 뒤집힐 수 있음을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그 확률적 희박함에 도박을 걸고 있을 뿐이다.
결국 우리가 말하는 이성은 '우주는 합리적이다'라는 근거 없는 신앙 위에서만 작동한다. 질서에 대한 믿음은 과학적 발견의 결과물이 아니라 과학을 시작하기 위한 최소한의 입장권이다.
우리는 과학을 통해 형이상학에서 탈출했다고 믿었으나, 사실은 가장 정교하고 거대한 형이상학의 성채 안으로 스스로를 가둔 것일지도 모른다. 질서란 우주의 본질이 아니라, 혼돈이라는 심연 앞에 선 인간이 내뱉는 처절한 자기 최면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최면 덕분에 오늘 하루를 비로소 평온하게 살아낸다.
#생각번호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