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는 어떻게 발명되었나
인류 역사의 대부분은 "낯선 이는 곧 적"이라는 냉혹한 공식 위에 있었다. 헨리 휘튼이 묘사한 고대 국가들의 풍경처럼, 경계를 넘어온 이방인을 노예로 삼고 그 재산을 약탈하는 것은 죄악이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리스크 관리였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긴다. 만나자마자 공격하는 것이 본능인 세계에서, 대체 인류는 어떻게 대화를 시작하고 '상호불가침'이라는 정교한 질서를 만들어냈을까?
대화가 불가능하던 시절, 인류가 처음 선택한 방식은 역설적이게도 '침묵'이었다. 소위 '침묵의 교역'이라 불리는 이 기묘한 거래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치지 않은 채 경계선에 물건만 두고 물러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인류애가 아닌 철저한 경제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한 번의 약탈로 얻는 이익보다, 지속적인 물물교환으로 얻는 이득이 장기적으로 생존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평화는 도덕적 각성이 아니라, '약탈보다 거래가 싸게 먹힌다'는 비정한 이성에서 싹텄다.
거래의 이익을 확인했어도, 등 뒤에서 칼을 꽂고 싶은 본능은 여전했다. 인류는 이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두 가지 장치를 고안했다. 바로 '신성함'과 '공포'다.
사절의 손에 신의 지팡이를 들려 보내 "이 사람을 치는 것은 신을 치는 것"이라는 종교적 금기를 만들었고, 서로의 가족을 인질로 맞바꿔 "네가 나를 치면 네 자식도 죽는다"는 공포의 평형을 유지했다. 고대의 상호불가침은 뜨거운 신뢰가 아니라, 차가운 보복의 가능성 위에서 겨우 유지되는 아슬아슬한 줄타기였다.
게임 이론의 관점에서 볼 때, 단 한 번의 만남은 배신(공격)이 최선이다. 하지만 이웃 국가처럼 계속해서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상황(반복되는 게임)에서는 협력이 가장 높은 보상을 가져다준다. 인류는 수천 년간 피를 흘리며 이 수학적 진리를 몸소 체득했다.
반복되는 만남 속에서 서로를 파괴하지 않는 '최적의 경로'를 찾아내고, 그것에 '정의'와 '국제법'이라는 근사한 이름을 붙여주었다. 즉, 우리가 믿는 국제적 질서는 인류의 선함이 만들어낸 꽃이 아니라, 서로를 죽이고 싶어 하는 본능을 억제하기 위해 쌓아 올린 견고한 댐과 같다.
결국 상호불가침은 인류가 발명한 가장 위대한 '생존 기술'이다. 우리는 이제 외국인을 보며 칼을 뽑는 대신 환전소를 찾고, 약탈의 위험 대신 무역의 이익을 계산한다.
하지만 기억해야 한다. 이 평화로운 질서는 결코 인간의 기본값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것은 수많은 오해와 학살 끝에, '공격의 비용'이 '협력의 이익'보다 크다는 것을 깨달은 영리한 조상들이 물려준 유산이다. 우리가 누리는 국제적 정의는 본능을 이겨낸 이성의 승리이자, 오늘도 계속되는 처절한 경제적 타협의 결과물인 셈이다.
#생각번호202601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