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은 왜 권력이 되는가

예수의 죽음과 '굴복'이라는 단어에 대하여

by 민진성 mola mola

백 번 양보해서, 예수가 우리를 위해 희생했다는 명제를 사실로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스스로를 내던진 고결한 희생. 거기까지는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숭고한 영웅담이나 눈물겨운 인류애의 정수로 읽어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곧이어 뒤따르는 종교적 요구 앞에서 나는 멈칫하게 된다. “그러니 그를 구주로 모시고, 그 앞에 너를 낮추어 굴복하라.” 여기서 논리적 충돌이 발생한다. 누군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고 해서, 왜 내 삶의 주도권까지 그에게 귀속시켜야 하는가? 희생이 곧 위계의 근거가 되고, 그것이 굴복의 당위성으로 이어지는 이 연결 고리는 과연 온당한가?



채무인가, 아니면 새로운 관계인가

보통의 인간관계에서 누군가의 희생은 '부채감'을 낳는다. 나를 위해 대신 매를 맞은 친구가 있다면 나는 평생 미안함과 고마움을 안고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친구가 "내가 대신 맞았으니 이제부터 내 말만 들어"라고 한다면,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일종의 '거래' 혹은 '정신적 지배'로 변질된다.

기독교가 말하는 '주님(Lord)'이라는 표현이 이처럼 권위적인 상하관계로만 읽힌다면, 그것은 분명 거부감이 드는 지점이다. 하지만 신학의 문법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면, 이 '굴복'이라는 단어 밑에 깔린 다른 층위의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굴종이 아닌 '신뢰의 양도'

신학적 논리에 따르면, 예수의 희생은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만큼 내놔'라는 식의 보상을 요구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압도적인 힘을 가진 존재가 나를 위해 죽을 만큼 나를 사랑한다면, 내 삶을 그에게 맡겨도 안전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하려는 일종의 '증명'에 가깝다.

여기서의 굴복은 공포에 질려 무릎을 꿇는 비굴함이 아니라,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선한 존재에게 내 삶의 핸들을 기꺼이 넘겨주는 '자발적 신뢰의 양도'인 셈이다. 비유하자면, 실력을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의사에게 몸을 맡기는 것은 굴종이지만, 세계 최고의 명의에게 수술대를 맡기는 것은 '살기 위한 선택'인 것과 비슷하다.



질서의 회복이라는 관점

또 하나의 관점은 '위치의 재정렬'이다. 기독교는 인간의 근원적인 불행이 창조주와 피조물의 질서가 뒤섞인 데서 온다고 본다. 예수가 보여준 희생과 순종은 인간이 잃어버렸던 '본래의 자리'를 회복하는 모델 하우스 같은 역할을 한다. 즉, 그에게 굴복한다는 것은 억압된 노예가 되는 것이 아니라, 망가진 기계가 원래의 설계도대로 돌아가 정상 작동하기 시작하는 '회복'의 과정으로 설명된다.



나가며

물론 이 모든 설명에도 불구하고 '굴복'이라는 단어가 주는 거부감은 여전히 남는다. 인간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현대인에게 누군가를 '주님'이라 부르며 자신을 낮추는 행위는 본능적인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의 주장은 논리적인 강요라기보다 하나의 거대한 제안일지도 모른다. "그의 희생이 당신에게 권위적 굴복을 요구하는 채권자의 독촉장입니까, 아니면 당신의 삶을 맡겨도 좋다는 신뢰의 보증서입니까?" 이 질문에 어떤 마침표를 찍느냐에 따라, 누군가에겐 불편한 종속의 종교가, 누군가에겐 안식의 신앙이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번호20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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