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정교한 야만

철학이 노예를 예찬할 때

by 민진성 mola mola

찬란한 문명 뒤에 숨겨진 기괴한 공포

고전적 고대 국가의 풍경을 상상해 본다. 한쪽에서는 대리석 기둥 사이로 우아한 토론이 오가고, 예술과 과학이 꽃을 피운다. 조국을 풍요롭게 만들기 위해 먼 길을 떠난 철학자는 진리를 탐구한다. 하지만 그 찬란한 문명의 이면에는 기괴한 공포가 도사리고 있었다. 국경을 넘는 순간, 당대 최고의 지성조차 언제든 '야만인' 주인의 노예로 팔려 갈 수 있는 시대. 법이라는 울타리가 오직 '우리'만을 보호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지성의 이름으로 집행된 비정한 선언

당시 그리스의 가장 유능하다 칭송받던 철학자는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해 펜을 들었다. 그리고 그는 놀랍게도 이렇게 선언한다. "어떤 이들은 자연에 의해 노예로 예정되어 있으며, 그들을 사냥하고 노예로 삼는 것은 정당한 전쟁이자 합법이다." 그의 논리는 정교했다. 이성이 신체를 지배하듯, 이성이 결여된 '야만인'은 이성이 충만한 '그리스인'의 지배를 받는 것이 자연의 섭리라는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실소(失笑)가 터져 나왔다. 법과 철학이라는 고결한 이름으로 포장했지만, 결국 그 알맹이는 자신의 풍요를 위해 타인의 고통을 정당화한 '세련된 폭력'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문명이라는 이름의 가장 성실한 야만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이 그토록 경멸하며 '야만'이라 부르던 행위—타인을 납치하고, 인격을 말살하며, 노동을 착취하는 짓—를 정작 문명국가라는 이들이 '정의'라는 이름으로 가장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들에게 문명이란 타자를 이해하는 능력이 아니라, 타자를 얼마나 논리적으로 짓밟을 수 있는지를 겨루는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누가 진짜 야만인인가라는 질문

나는 질문하게 된다. 과연 누가 진짜 야만인인가?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외적이었을까, 아니면 앉은자리에서 웅변과 논증으로 수만 명의 삶을 노예의 운명으로 낙인찍은 그 고상한 철학자였을까. 문명은 때로 인간의 비겁함을 숨겨주는 훌륭한 은신처가 된다. 스스로를 '교양 있는 사람'이라 믿는 이들이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휘두르는 논리는, 투박한 몽둥이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집요하다.



우리 안의 '고상한 야만'을 경계하며

결국 야만은 문명 밖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문명의 심장부, 즉 "내가 누리는 이 안락함은 당연하며, 이를 위해 누군가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법칙"이라고 믿는 그 오만한 확신 속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수천 년 전 철학자의 궤변을 보며 느끼는 이 불쾌한 '웃픔'은, 어쩌면 현대라는 이름의 문명 속을 살아가는 나 자신에게도 유효한 경고일지 모른다.



성벽 밖의 진실을 마주하는 용기

나 역시 나의 편리를 위해 누군가의 보이지 않는 노동과 희생을 '어쩔 수 없는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방관하고 있지는 않은가. 고상한 언어로 무장한 채, 나만의 작은 성벽 안에서 또 다른 의미의 야만을 정의라고 부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진정한 지성이란 논리로 무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논리가 혹시 누군가를 칼날처럼 베고 있지는 않은지 끊임없이 의심하는 태도에서 시작되는 것임을, 고대의 서글픈 풍경을 통해 되새겨 본다.





#생각번호2026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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