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은 어떻게 야만을 발명했는가
우리는 흔히 법이 '만인의 평등'을 위해 존재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마주한 법의 초상은 사뭇 다르다. 법은 질서를 세우기 전, 가장 먼저 '선'을 긋는 법부터 배웠다. "누가 우리인가, 그리고 누가 우리가 아닌가." 고전적 고대 국가들이 예술과 과학으로 조국을 풍요롭게 채워갈 때, 그 풍요의 울타리 밖에서 철학자조차 노예로 전락할 수 있었던 이유는 법이 그들을 '인간'의 범주에서 지워버렸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도덕 담론이 인류애와 보편성을 말할 때, 법은 지독하리만큼 철저하게 '차별'을 전제로 움직였다. "나는 너와 다르다"는 오만한 확신이 법이라는 정교한 언어를 만나는 순간, 한쪽은 지배하는 문명인이 되고 다른 한쪽은 지배받는 야만인이 된다. 당대 최고의 지성이라 불리던 철학자가 야만인을 노예로 삼는 것이 합법이라고 당당히 선언할 수 있었던 바탕에는, 법이 그어놓은 그 서슬 퍼런 경계선이 있었다.
법이 없던 시절의 폭력은 그저 날것의 폭력이었다. 하지만 법의 이름을 빌린 폭력은 '정의'라는 고상한 외피를 입는다. 나와 다른 타자를 '자연에 의해 노예로 예정된 존재'라고 규정하는 순간, 약탈은 정당한 획득이 되고 유괴는 합법적인 사냥이 된다. 결국 법은 야만을 억제하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야만적인 행위를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안심하고 자행하기 위해 발명된 도구였을지도 모른다.
문명국가라는 자부심은 역설적이게도 '법 밖의 사람들'을 얼마나 철저하게 타자화하느냐에 따라 공고해졌다. 그들이 말하는 법치란 울타리 안의 평화를 의미했을 뿐, 울타리 너머의 생명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반쪽짜리 약속이었다. 나는 여기서 법의 가장 서늘한 본질을 본다. 법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을 정하기 위해, 반드시 누군가를 '보호받지 못할 대상'으로 밀어내야만 작동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시간이 흘러 노예제는 사라졌지만, 법이 가진 '선긋기'의 본능은 여전히 우리 곁을 배회한다. 국적, 신분, 자본의 유무에 따라 법은 여전히 "누가 우리인가"를 끊임없이 묻는다. 고대 철학자의 궤변을 보며 우리가 느끼는 묘한 불쾌감은, 사실 우리 시대의 법 역시 누군가를 교묘하게 '야만'의 위치로 밀어내고 있지는 않은지 묻는 양심의 가책일지도 모른다.
진정한 지성이란 법이 그어놓은 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선이 누구를 배제하고 있는지 질문하는 데서 시작된다. 나와 남을 가르는 전제 위에 세워진 정의는 언제든 야만으로 회귀할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 문명의 풍요 속에서 노예 사냥을 정당화하던 그 고결한 목소리들이 오늘날 우리에게 남긴 교훈은 단 하나다. 법이 '차별'을 정의라고 부르기 시작할 때, 그곳이 바로 가장 정교한 야만이 시작되는 지점이라는 사실이다.
#생각번호20260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