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의 외투를 입은 야만인

법과 본능 사이에서

by 민진성 mola mola

법이라는 얇은 유리창

우리는 스스로를 문명인이라 자부하지만, 때때로 우리 안에서 들끓는 뜨거운 열망을 마주하며 당혹감을 느낀다. 흉악한 범죄 소식을 들을 때, 법의 판결이 내 분노의 크기에 미치지 못할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외친다. 법의 절차를 건너뛰고 내 손으로 직접 징벌하는 '사적 제재'의 쾌감을 상상하기도 한다. 그 순간, 우리가 수천 년간 공들여 쌓아 올린 법치라는 성벽은 한없이 낮고 위태로워 보인다.



복수, 가장 오래된 정의의 얼굴

사실 복수심은 인류가 생존을 위해 품어온 가장 오래된 감정이다. 내 고통을 상대에게 그대로 돌려줌으로써 정의를 바로잡겠다는 열망은 법보다 훨씬 앞선 본능이다. 그렇다면 질문하게 된다. 법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더 큰 폭력으로 응징하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면, 우리는 여전히 야만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일까? 어쩌면 문명이란 야만을 완전히 제거한 상태가 아니라, 내 안의 야만성을 법이라는 얇은 유리창 너머로 간신히 가두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적 제재라는 유혹의 함정

우리가 사적 제재에 열광하는 이유는 그것이 즉각적이고 명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대 철학자들이 '우리'를 지키기 위해 '그들'을 야만인으로 규정하며 폭력을 정당화했듯, 사적 제재 역시 '나의 정의'를 위해 '타인의 권리'를 일방적으로 파괴할 위험을 내포한다. 내가 휘두르는 복수의 칼날이 과연 정의인지, 아니면 그저 세련되게 포장된 또 다른 폭력인지 구분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사적 제재의 유혹에 굴복하는 순간, 우리는 그토록 혐오하던 가해자의 야만성과 닮아가게 된다.



문명이란 야만과 싸우며 뒷걸음질 치는 과정

나는 우리가 여전히 야만인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싶다. 우리는 야만인과 문명인 사이의 경계선 위를 아슬아슬하게 걷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내 안의 파괴적인 욕구를 인지하면서도, 그것이 가져올 더 큰 혼돈을 막기 위해 차가운 법의 테두리를 선택하는 그 비참한 인내가 바로 문명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복수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멈추어서는 것, 그것은 야만성이 없어서가 아니라 야만성을 통제하겠다는 지독한 의지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인내로서의 지성

진정한 문명은 '야만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야만을 다루는 고통스러운 방식'에 가깝다. 법이 완벽하지 않고 때로 무력해 보일지라도, 우리가 사적 제재의 유혹 앞에서 멈칫거리는 이유는 그 야만의 연쇄가 결국 나 자신마저 삼킬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도 내 안의 '눈에는 눈'을 외치는 야만인과 조용히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뜨거운 분노를 차가운 이성으로 누르는 그 순간, 아주 짧게나마 문명인으로서의 자각을 얻는다.





#생각번호202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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