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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amola Feb 15. 2020

런던에서 보낸 기념일

런던과 이별하는 일 D-21 | 영국의 기념일들


 발렌타인데이라 그런지 밖에서 꽃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많았다. 손에 들린 장미 한 송이를 기차에서 내리는 순간까지 바라보며 웃던 여자의 미소가 아직도 생각이 난다. 얼마나 좋았으면 기차 여정 내내 웃고 있었을까. 발렌타인데이에 꽃을 사는 기분은 어떻고, 받는 기분은 또 어떤 걸까.


 한국에서는 발렌타인데이가 여성이 좋아하는 사람에게 초콜릿을 주는 문화로 정착했는데, 런던에서는 남녀를 딱히 구분하지 않고, 초콜릿이나 꽃다발을 선물하거나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으며 보낸다. 여성인 친구들끼리 축하하며 보내는 걀렌타인스데이(Galentine's day: 여자를 뜻하는 Gal과 발렌타인데이의 합성어)의 형태도 있다.


 기념일을 잘 챙기지 않는 성격이었는데 기념일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화권에 살다 보니 아무래도 이제는 기념일들이 조금 소중하게 느껴진다. 마치 카푸치노에 얹은 계피 가루처럼, 가끔씩 있는 기념일이 무료한 일상에 재미를 더할 핑계를 제공해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무료한 일상에 계피 가루가 되어줬던 영국의 기념일을 정리해봤다.




옥스포드 서커스 거리에 설치된 2019년 크리스마스 데코레이션 이미지 출처: Secretldn.com


1. 크리스마스 (12월 25일)


 런던에서 축하하는 기념일들 중에 가장 큰 기념일은 아무래도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오면 상점에서는 판네토네(Panettone), 멀드 와인(Mulled Wine), 민스 파이(Mince Pie), 어드번트 캘린더(Advent Calendar) 같은 크리스마스 상품들이 진열대를 차지하고, 길거리에는 각 동네마다 특색 있는 조명과 트리가 생긴다. 옥스포드 서커스와 피카딜리서커스 일대를 따라 설치되는 조명들은 크리스마스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이 일대에 조명이 설치되면 그때부터 '이제 곧 크리스마스구나, 완연한 겨울이구나'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즌에 열리는 대부분의 행사는 당연히 크리스마스 위주로 돌아간다. 그중 개인적으로 가장 즐거웠던 건 자연사박물관(Natural History Museum)과 소머셋 하우스(Somerset House)를 포함한 런던 곳곳에서 열리는 스케이트 링크와 하이드 파크에서 열리는 윈터 원더랜드다. 스케이트를 타고난 후 마시는 코코아와 바가지인 걸 알면서도 사 먹는 윈터 원더랜드의 추로스, 핫도그는 크리스마스 시즌에만 즐길 수 있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지곤 한다.


자연사 박물관 아이스 링크 ©molamolaj



2. 본파이어 나잇 (11월 5일)


 유학을 시작했을 당시 유럽 내 ISIS의 테러가 한참 극성이었다. 그때는 본파이어 나잇(Bonfire Night)이 존재한다는 사실도 몰라서, 집 밖에서 들리는 폭죽 소리가 테러리스트의 총성인 줄 알고 혼자 벌벌 떨었던 기억이 있다. 뉴스를 찾아봐도 아무런 속보도 올라오지 않길래 친구에게 물어봤더니, 그 날이 본파이어 나잇이었다. 본파이어 나잇은 1605년 11월 5일, 영국 지방 카톨릭 신자들이 제임스 1세 왕을 살해하고, 카톨릭계 인물을 국가 원수로 대체하려고 영국 의회 밑에 설치한 폭발물을 가이 포크스(Guy Fawkes)가 지키고 있다가 체포된 날이다. 가이 포크스의 체포로 제임스 1세 왕이 무사히 살아남았다는 사실을 축하하며, 사람들은 런던 주변에서 모닥불을 피웠고, 몇 달 후, 국가 휴일로까지 제정돼 현재까지 영국에서 기념하고 있다. 현재는 그 형태가 모닥불에서 불꽃놀이로 바뀌었고, 해당 날짜인 11월 5일뿐만 아니라 11월 초부터 기념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그렇기 때문에 런던에서 11월 초쯤 폭발음이 들리면 본파이어 나잇을 축하하는 불꽃놀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3. 할로윈 (10월 31일)

할로윈 간식으로 가득 채워온 친구의 핸드 캐리어 ©molamolaj

 만약 런던 내에서 미국인 친구를 사귀게 된다면, 할로윈도 빼먹을 수 없는 기념일이 된다. 물론, 영국에서도 할로윈을 챙기긴 하지만, 경험상 미국인 친구들의 할로윈 사랑은 영국인들의 그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한 번은 할로윈 2주 전에 가족들을 보러 미국에 잠시 다녀온 친구가 핸드 캐리어에 할로윈 캔디, 젤리, 카라멜 애플, 견과류로 채워오는 걸 보며 할로윈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확인한 적이 있다. 미국인들에게 할로윈이 어떤 의미일지 짐작만으론 이해하긴 어렵지만, 영국에서는 보통 젊은 사람들이 코스튬을 입고, 술을 마시는 날 정도로 여겨진다. 아이들이 가끔 "Trick or Treat"을 외치며  길거리에서 간식을 요구하는 경우가 있지만, 집에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다. 작년에는 길거리에서 어떤 아이가 지나가는 남성에게 "Trick or Treat"을 외치면서 "Where did you get your suit from?(슈트 어디서 사셨어요?)"라고 물어보는 장면을 목격했는데 어른 흉내를 내는 게 너무 귀여워서 주변에 있던 모두가 웃음을 터트렸던 기억이 있다.





 이 외에도 굿 프라이데이, 부활절 등의 기념일이 있지만 영국 내에서 가장 크게 기념하고, 개인적으로도 가장 그리워할 기념일은 이 세 가지 일 것 같다. 런더너들마저도 세상 따뜻한 사람들로 바꿔주는 마법의 크리스마스, 폭죽 소리는 싫어도 겁먹었던 기억을 생각하면 웃음이 나는 본파이어 나잇, 할로윈을 포함 모든 기념일을 술 마시는 날로 바꿔버리는 영국의 술사랑까지, 모두 그리워지는 날이 올 것이다. 그래도 그중 가장 그리울 건 아무래도 이 모든 날을 특별하게 만들어주었던 친구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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