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적인 원팀
오늘 아침 내 눈을 사로잡은 기사는 한화와 HD현대가 화해를 했다는 기사다. 두 기업은 1년 동안 법정공방을 벌여왔다고 한다. 이유인즉슨 HD현대중공업 직원 한 명의 군사기밀 유출 혐의가 유죄를 선고받으면 서다. 한화오션 입장에서 상대의 약점은 기회였나 보다. 이 판결을 토대로 HD현대중공업이 KDDX(한국형 차기구축함) 사업에 입찰할 자격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법원에선 그건 제한 사항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자 한화오션은 불복하고, 이번엔 HD현대중공업은 KDDX자료 불법 탈취사건에 임원이 개입했는지를 수사해 달라고 했고, 이에 HD현대중공업이 명예훼손으로 맞고소를 한 것이다. 방산시장은 유일한 라이벌만 꺾으면 다 가져가는 과점 형태의 시장이다. 사업 진입장벽이 높고, 복잡하니 당연하다. 문제는 서로 쓰러뜨리려 싸우다 정작 중요한 사업을 따 내는데 둘 다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
지구에 큰 전쟁이 두 군데서 일어나는 동안 우리나라 무기가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한화에어로스페이스가 폴란드에 K9 자주포를 대규모 수출하고, 최근에 2차 계약을 했다는 소식도 들려온다. 트럼프가 당선되면서 또 한 번 한국의 방산업이 주목을 받았다. 이 와중에 10조 호주 잠수함 수주전에서 K방산 대표 두 기업 모두 똑 떨어지고 만 것이다. 생각지 못한 실패에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 모두 꽤나 충격을 받은 듯하다. 잘 들여다보니 일본이나 독일 같은 나라들은 이미 기업들이 힘을 합쳐 원팀을 구성해 수주에 참여했다고 한다. 한 수 아래로 봤던 일본과의 수주경쟁에서 지다니. 억울할 만도 하다.
한국의 내홍이 수주 실패의 원인이 됐다.
내홍이란, 집단이나 조직 내에서 자기들끼리 일으킨 분쟁이라는 뜻이다. 왜 여기서 나는 우리 부부가 떠올랐을까. 나는 지금 전업주부이니 딱히 이해관계가 얽힌 집단이 없다. 내가 겪는 분쟁의 대부분, 아니 거의 모든 지분은 남편과의 갈등이 차지한다. 그렇다고 우리가 HD현대중공업과 한화오션의 관계처럼 과점형태의 구조일리 없다. 남편이 내 라이벌도 아니거니와 그를 무너뜨려야만 내가 이기는 상황도 결단코 아니다. 따지자면 우리는 본래 원팀이었다.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이 원팀을 구성한 목표가 경제적인 이득이라면 우리는 사랑하는 마음이 씨가 되어 아이를 낳아 잘 기르고, 노년까지 행복한 인생을 살아나가는 것이 목표라면 목표다.
어쨌든 두 기업은 전략적으로 팀을 이뤄 다음에 있을 캐나다 디젤 잠수함프로젝트와 폴란드, 필리핀 잠수함 입찰 사업까지 함께 참여할 계획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장 화해의 모양새는 갖췄지만 갈등의 불씨가 완전히 꺼진 건 아니다.
아니 이 또한 우리 부부에게 해당되는 말 아닌가. 큰 소리를 내면서 싸우지는 않는다. 법정공방 같은 경험도 없다. (법원 사이트에서 서류를 출력해 본 경험은 있지만) 함께 외식을 하고, 쇼핑하고, 아이 일에 있어서는 최선을 다해 논의하고, 심지어 웃고, 춤추고 노는 날도 있다. 하지만,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적어도 내 입장에서는 말이다. 뜬금없이 용서가 안 되는 수년 전의 일들이 떠올라 가만히 밥 먹고 있는 그에게 욕을 해주고 싶을 때도 있고, 너무 일찍 들어와 유튜브 쇼츠를 크게 틀어놓고, 아이들 독서를 방해하는 날엔 그의 핸드폰을 낚아채 멀리 던져버리고 싶은 충동이 일 때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욕을 하거나 물건을 내던졌던 일은 없다. 조용히 국을 한 술 더 떠주면서 다른 얘길 하고, 핸드폰 볼륨을 조금 줄여달라 정중히 부탁한다. 말투는 그리 상냥하지 못할지언정 맥락 없이 끓어오르는 분노를 난데없이 드러내지는 않는다. 마치 해외수주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원팀을 이룬 기업들처럼 나는 아이들이 올곧은 성인으로 자라나길 바라는 마음과 행복한 할머니가 되길 바라는 개인적인 목표를 위해 남편과 한 팀을 이루었다 생각한다.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는 불씨들에 불이 붙지 않도록 잠자코 마음 조금 깊은 곳에 묻어둔다.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해보자며 덤벼들었던 지난날의 아웅다움도 승자가 누구인지 결론 나지 않은 채 미뤄둔다. 심지어 최근에는 남편의 출근길에 안아주기를 시전 하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하던 일을 멈추고, 그 시간엔 아빠를 안아주러 간다. 그냥 하던 거 하라고. 나오지 말라고 손사레 치던 남편은 이제 현관 앞에서 우리가 나올 때까지 기다린다. 나와 아이들이 눈치를 영 못 채고 있는 날엔
아빠 나가는데~
라면서 굳이 안아 달라는 티를 낸다. 묻어두고, 미뤄두는 건 비단 나만한 노력은 아닐 것이다. 그도 나에게 쏘아붙이고, 잘잘못을 가려내고 싶은 무언가를 떨떠름하게 삼켰을 것이다. 우리의 행복한 앞 날과 아이들이 상처 없이 올곧게 자라길 바라는 마음에서 말이다. 나는 이걸 '목표'라고 표현했지만, 남편이 그렇게 표현하면 그게 그렇게 또 비정하고, 딱딱하게 들릴 것만 같다. 뭘 해도 욕먹는 게 남편의 자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묻어두고, 미뤄두면서 으쌰으쌰 지내다 보면 분명 덩어리였던 것들이 가루가 되어 흔적 없이 좋은 것들과 어우러져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이 글을 쓰면서 그때 욕하지 않고, 내던지지 않은 나를 무한 칭찬 중이다.
이쯤에서 방산의 방자도 모르는 40대 전업주부인 내가 한화오션과 HD현대중공업에게도 잔소리 한 번 해보련다. 갈등의 불씨. 그거 조금 미뤄두고, 묻어 둬 보라고. 돈이 걸린 비즈니스야 인정으로 사는 부부관계와는 천지차인 건 알지만, 어차피 사람 간의 일인데 뭐가 또 그렇게나 다를까. 해외수주 한 두 번 성공하고 나면 (이를테면 아이의 예쁜 모습을 계속 보다 보면) 수의 계약으로 할지 경쟁입찰로 뽑을지(오늘 빨래는 누가 했고, 아이랑은 누가 놀아줬는지)는 큰 문젯거리가 아닐 수 있다. 아이가 성장해 가는 걸 지켜보며 우리 부부도 자잘한 감정이나 말다툼을 줄여나가면서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 일단 '원 팀'을 하기로 수년 전 약속 했으니 어쩔 수 없다. 우리 K방산을 대표하는 원팀도 조금 참고, 뒤로 물러나면서 성장을 지켜보고, 즐겨보면 어떨까. 너무 속 편한 소리이려나. 그저 사사로운 감정이나 욕심에 더 중요한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 이 아줌마가 진짜 뭘 모르네 하면 또 할 말이 없다. 이러나 저러나 조만간 들려 올 캐나다 잠수함 수주 성공소식에 성격 급한 아줌마는 미리 축하의 말을 전하고 싶다. 혹시 그날은 아침에 아이들과 남편 배웅하느라 깜박하고, 신문을 읽지 못할 수 있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