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아리 인사이트]
Antony & Cleopatra - Shakespeare’s Globe Theatre in London
라이브의 묘미가 이런 것 아니겠냐만은, 배우들에게는 우당탕탕으로 기억될 막공이 아니었을까 싶다. 1막이 끝나고 인터미션부터 비가 내려 비를 맞으며 연기하고, 빗물 때문에 넘어지고, 허리띠가 풀려서 상대 배우가 연기하며 자연스럽게 채워주고, 공연 중 재채기를 하고, 피 주머니가 잘 안 터지고. 소대에서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오갔을지 상상만 해도 미소가 지어진다. 실수와 사고가 있었지만 얼마나 즐거울까. 이전 공연을 못 봐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리처드 3세도 그랬듯이 이 공연 역시 막공이라고 더하거나 덜하지 않았을 것 같다. 늘 하던 대로, 하지만 그날그날 상황이나 관객들과 호흡하며.
영어대사를 제대로 이해 못 할 것이 뻔하기에 줄거리와 등장인물을 미리 공부하고 가서 대충 흐름은 파악할 수 있었다. 많은 이야기가 담겨있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전환이 빠르고, 대사로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도 꽤 많았다. 무대 중앙과 양 옆, 뒤쪽에 모니터가 설치되어서 모든 대사가 자막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자막보고 연기 보고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자막을 봐도 내용을 제대로 알 수 없으니 차라리 배우들과 무대에 집중하기로 했다.
이 극은 독특하다.
배우들이 하는 대사가 영국식 수어와 말하는 영어가 섞여있다. 어떤 장면에서는 수어만 나오고, 어떤 장면에서는 말로 하는 영어가 나오고, 어떤 장면에서는 수어와 음성영어가 모두 나온다. 어렴풋하게나마 내가 파악한 바로는, 클레오파트라와 그의 이집트 사람들은 수어를 사용한다. 안토니우스 쪽은 수어와 음성언어를 모두 사용하고, 옥타비아누스는 음성언어를 사용한다. 이것 역시 크게 삼각 구도로 나누어지는 관계성을 언어로 보여준 것으로 보였다. 클레오파트라와 사랑을 나누고 옥타비아누스와 동료로 시작하는 안토니우스는 두 가지 언어를 모두 사용한다. 중간에 위치한 그의 위치가 보이는 것 같다.
공연을 보기 전에 감독과 부감독의 이야기를 읽었다. 이 글에서부터 나는 이미 이 공연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이중 언어에 대해 설명하며, 구어 영어를 사용하는 안토니우스와 영국 수어를 사용하는 클레오파트라는 서로 소통할 때 그들의 마음이 단지 들리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지 확인한다고 말했다. 언어의 차이, 문화에 대한 존중 부족, 다른 하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장벽들이 오늘날에도 마찰과 괴로움, 좌절감을 유발한다며, 모두가 동등하게 적응하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이중 언어 세계를 지향한다. 그것을 이들의 사랑을 통해 무대에서 보여주기 위해 연출에 힘썼다고 한다. 서로 다른 두 문화권의 연인이 서로 다른 신념을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것이 관계 속에서 여실 없이 나타나고 사정없이 흔들린다.
수어를 사용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서로 다른 언어로 서로 소통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준 것이 더 놀란 포인트였다. 서로 다른 언어를 쓰지만 서로의 말을 이해하고 대화한다.
우리는 어쩌면, 같은 언어를 쓰면서도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을 마주하고 있지 않을까. 이해의 부재, 어긋나는 소통들이 한 가지 언어와 하나의 민족 안에서도 이루어지곤 한다. 어쩌면 소통과 이해라는 것은 서로 다른 우리들에게, 하나하나 개개인 모두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우리를 이루는 사회와 세상과 그 속의 관계, 문제들을 생각하게 하는 극이다.
이런 이중언어 특히 수어를 하며 극을 이끄는 배우들이 놀라웠다. 음성 없이 수어와 손짓 발짓 표정, 그리고 온몸으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대사가 나온다고 하더라도 배우들은 나의 언어를 그저 해내야 한다. 침묵을 보이는 것으로 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관객들 역시 더 집중해서 봐야 한다.
이런 공연을 연출하는 것도, 연기를 해내는 것도, 집중해서 관람하는 것도 모두 다 너무 성숙한 순간들로 이루어져 있다. 성숙한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이렇게까지 공연을 보며 무엇을 얻어갈까. 무엇이 바뀌는 걸까. 나는 어떤 걸 줄 수 있고, 어떤 걸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야기의 힘은 무엇일까. 역시나 오늘도 연기와 공연과 이야기와 예술과 문화에 대해 물음표가 가득 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