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보라 2018 작품
처절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누구나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는 상처를 가지고 있다. 사람들과 복닥복닥 거리며 그 상처는 치유되기도 혹은 더 깊게 파이기도 하지만 이런 상처는 비밀스럽다.
영화는 여러 줄기로 이야기를 진행시키지만 결국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로 귀결된다.
은희의 혹, 엄마와 아빠 싸움으로 인해 아빠 팔에 생긴 흉터 그리고 성수대교 붕괴
은희의 혹이나 아빠의 흉터는 대상에게 꽤 직접적이고 위협적인 것으로 비치지만 은희의 혹 수술 이후 은희 혼자 해내는 병원 쇼트, 부부 싸움 다음 날 소파에 앉아 웃음 짓는 쇼트로 이어지는 편집은 그들의 상처를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넘기게끔 한다.
그들은 상처가 시각적으로 목격됐을 때 순간적인 공포심에 눈물을 짓기도 하고 두려움에 떨기도 하지만 이내 그들은 상처를 다시금 묻어둔다. 우린 잘 살고 있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애써 웃어 보이면서 말이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은희의 시선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아."라고 말하던 한자 선생님의 말을 연상시킨다..
중학생 은희의 불행의 근원은 가족이다. 가족과의 관계에서 풀리지 않는 문제는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결국 바깥에서 표출되기 마련이니까.내가 가장 숨기고 싶은 상처였어도 말이다.
아무리 애타게 불러도 돌아보지 않는 엄마처럼, 도둑질을 해도 찾아오지 않는 아빠처럼, 나를 사이에 두고 남자친구를 방에 데리고 오는 언니는 은희에게 늘 불안을 안긴다.불완전하게 엮여있는 관계 속에서 은희는 더더욱 외부인에게 사랑을 애원하고 받고자 한다. 친구에게도 남자친구에게도 학교 선생님에게도 하다못해 후배에게도.
하지만 그들은 언젠가 배신을 하기도 하고 이유 없이 멀어지기도 하며 갑작스럽게 떠나기도 한다.
이 어린아이는 대체 어디에 마음을 두어야 할까.
영화에서 성수대교 붕괴는 사회적으로 단절된, 붕괴되어버린 관계를 보여주는 것 같다.
가족이 모여 앉아 있을 거실은 늘 쓸쓸하게, 깨진 스탠드 조각처럼 남겨져있다.
가장 친밀하고도 따뜻하게 이루어져야 할 공간이 자꾸만 그늘질 때, 그곳에 서서 빛나는 창문을 바라봐야 할 때.
은희는 그렇게 상처를 떠안으며 살고 있다.
나의 삶엔 언제쯤 빛이 올까요?라는 질문에 빛은 너의 반대편에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랬다면 은희는 베란다에 서서 하염없이 창문 너머 빛을 볼 필요가 있었을까.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면 진심으로 말해주고 싶다. 나는 그저 각자의 상처를 별게 아니야라고 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의 상처의 크기를 재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비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서로 서로 도닥여 줬으면 좋겠다. 살기 힘들다는 이유로 서로를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어코 상처가 나야지만 눈물을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도 나의 주변 사람에게도, 그렇게 말해주며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