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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즈 Jul 25. 2020

봄의 폭풍

나의 그리운 친구 H에게 (2014년 쓰촨 성 대지진 희생자들을 추모하며

(나는 손에 곧잘 익은 연필을 들어 아무 종이나 짚어 들고 선 단숨에 편지를 적어나간다)



 학교 안에 나만의 공간이 있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야. 물론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 특별할 게 없어 보이는 평범한 벤치가 나에게는 이미 십 년이나 함께 한 소중한 공간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지만, 난 상관없어.


 우리 학교에 가면 도서관 앞에 이제 막 초록빛을 발하기 시작한 꽤 키가 큰 벚꽃 나무 아래로 몇 개의 벤치가 있어. 그중에 내가 항상 책을 보던 자리는 가운데 벤치였지. 거기서 지금처럼 따뜻한 봄바람이 불어오는 날이면 내가 읽고 싶은 책들을 옆에 쌓아두고 그것을 베개 삼아 낮잠을 자기도 하고, 가끔은 수업을 빼먹으며 내가 속한 세상과 전혀 다른 활자의 세계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책을 읽어 댔었지.


 대부분이 고전이었는데,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 도예도프스키의 <까르마조프씨네 형제들>,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 같은 책들이었지. 난 사실 헤르만 헤세가 쓴 <봄의 폭풍>의 내용이 이제는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그냥 저 제목이 맘에 들어.  


 봄의 폭풍이라... 멋있는 말이지 않아?


 봄이 폭풍처럼 많은 것들을 몰고 온다잖아. 근데 이상하지 않아? 폭풍은 어마 무시하게 세찬 바람과 비를 퍼부으면서 온 세상을 뒤엎어버리는데 봄에 그런 폭풍을 본 적이 있어? 그래서 얼마 전에 학교 구석구석을 살펴보곤 했는데, 정말 봄은 내가 미쳐 보지 못했던 많은 것을 몰고 왔더군.


 본관 앞 작은 연못을 가로지르는 아스팔트 길가에 붉은색,  노란색, 보라색, 흰색 튤립과 분홍색, 자주색 철쭉, 노란색 산수유나무, 붉은 버가목 열매, 싱싱한 새 잎을 연 단풍나무와 벚나무, 그리고 아직은 이름을 잘 모르지만 열여덟 소녀의 싱그러움 같은 나무들의 모습이 내겐 정말 봄이 폭풍처럼 몰려오는 것 같이 보여. 모든 세상이 온통 생명력 가득한 초록으로 다시 태어나는 거지. 이건 정말이지 멋진 일이야.


 요즘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 5시나 6시쯤? 그 전날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곧바로 잠들어 버리기 일쑤거든. 덕분에 잠은 많이 자는 편이야. 홀로 해도 뜨지 않고 아무도 깨지 않은 새벽에 일어나 차가운 물에 머리를 감고, 정갈하지만 소박한 밥을 차려 먹고, 남는 시간에는 짧은 시 한 두 편 정도를 읽고 잠시 묵상한 후 집을 나서면 세상이 고요한 바다 물안개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것처럼 느껴져. 물론 나의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항상 규칙적인 생활은 나에게 이러한 차분함을 가져다주는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아.

  

 주말에는 특별한 약속이나 스케줄이 없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 빌려둔 책을 꺼내 들고 따스한 나만의 벤치에 자리를 잡고 하루 종일 책을 읽었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다 읽었는데, 내용이 그렇게 어렵지도 않고 흥미를 끄는 부분들이 많더라고. 사실 좀 노골적인 성적 표현들이 자주 등장해서 그렇지 자살한 나오코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어. 지금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상실의 슬픔이 남기고 간 공간을 채우지 못해 자살하고 있을 테니깐...


"태워버려도 남는 건 남고, 가지고 있어도 남지 않는 건 남지 않아요."


라는 살아남은 와타나베의 고백이 가슴에 와 닿는 것을 보니 내 안에 젊은 날 태웠어도 남아있는 것이 무엇이 있었나 돌아보게 돼. 그랬더니 지금껏 만났던 수많은 사람이 떠오른 것이 아니라 바로 한 사람, 너만 떠오르더라.


 너는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겠다. 그곳에도 봄은 오니? 아니면 항상 봄처럼 싱그러움과 영원히 사그라들지 않는 꽃들과 끝없이 여행을 다니면서 지내니? 네가 있지 않는 이곳의 봄과 읽어보지 못한 많은 책들,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해 전부 말해 주려면 세상의 모든 종이에 바닷물을 먹물 삼아 기록한다고 해도 모자라겠지? 그래도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볼게.


 이제는 정말 이상한 기분이 들어. 뭐라고 해야 할까... 비로소 스무 살이 된 대학생처럼 가끔은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이유를 알 수 없는 기대감과 기쁨에 빠져들곤 해. 나이는 이렇게도 많이 먹었는데 말이야. 그래도 너에게 난 영원한 젊은 날의 추억을 함께 했던 대학생이었으니깐, 그 기억만을 간직한 채로 나중에 다시 만나러 갈게. 지금은 봄이 너무 폭풍처럼 몰려오고 있어서 네게 갈 시간이 없다. 그렇지만 난 항상 너를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꼭 기억해주길 바래. 또 편지할게.


 그럼.... 안녕.



 편지를 다 쓰고 나서 나는 과연 이 편지를 어디로 부쳐야 하는 것일까 하고 오늘도 깊이 고민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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