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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즈 Aug 27. 2020

청두, 세번째 이야기 : 티베트 불교의 시작

 늦은 오후의 쓰촨 박물관


 주말이어서 그런지 우리가 대나무로 둘러싸인 공원에 도착했을 때, 주변 공원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곳이 과연 어디일까 궁금해하면서 대나무 숲 사이에 우뚝 솟은 커다란 건물로 시선을 옮겨 보았다. 그 건물의 현판에는 중국의 위대한 학자나 철학자가 휘갈겨 써내려 간 듯한 필체로 ‘쓰촨 박물관四川博物馆’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김 선생의 뒤를 따라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길에 잠시 주변을 살펴보았다. 박물관 공원 주위로 작은 강이 도도히 흐르고 있었고, 바람에 흩날리는 대나무 숲과 작은 강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지극히 평온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미 오후 네 시가 다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서둘러 표를 끊어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나를 앞서 박물관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는 김 선생의 발걸음 속에서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나에게 티베트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속 의도를 읽을 수가 있었다.


 박물관은 어린 시절부터 언제나 나의 흥미를 끌었었다. 그것이 왜 그런지,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박물관의 조용하고 차분한 조명이 가져다주는 신비로운 분위기가 나는 그냥 마음에 들었다. 또한 지금으로부터 몇 백 년에서 수 천 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의 삶과 생각이 담긴 유물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나도 수 백, 수천 년 전에 그들과 함께 있는 듯한 그런 착각이 들기도 했다. 어린 시절에는 가끔 순수한 상상에 빠져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아무런 생명이 없는 전시물들이 밝게 빛나는 조명이 꺼지고 사람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나면 가끔 다시 생명을 얻지는 않을까?’

 그래서 나는 언제나 사람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아무도 없는 박물관에서 홀로 남아 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힌 적도 있었다.


 막상 쓰촨 박물관에 들어와 보니 ‘또 어떤 티베트적인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조금은 흥분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나는 마음을 차분히 가져보려고 속으로 마음을 다잡아 보았지만 조금 긴장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이러한 복잡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에 사로잡힌 채 김 선생을 따라 사천 박물관 안으로 들어갔다.

 

 쓰촨 박물관 안에는 여느 박물관처럼 그 지역의 역사와 문화 문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다른 박물관과 비교했을 때 쓰촨 박물관은 유독 다른 특징이 하나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쓰촨 성에 가장 많이 분포되어 살고 있는 중국 내의 장족들의 삶과 문화와 역사에 대한 전시실을 따로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김 선생은 나를 데리고 다른 전시실을 그냥 지나쳐 바로 장족 전시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는 나에게 쓰촨 성에서 발견할 수 있는 중국적인 것이 아닌, 쓰촨 성 안에 살고 있는 장족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의외로 박물관 안에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김 선생은 나에게 전시관을 돌면서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알려 주려는 듯 이렇게 말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중국의 장족들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름인 '티베트인'이라고도 불리지요. 예로부터 중국의 서쪽 청장고원을 중심으로 현재 중국의 쓰촨 성, 칭하이 성, 간쑤 성, 윈난 성, 그리고 서장자치구에 흩어져 살고 있는 민족으로 인구는 약 540만 명이며, 주로 야크를 키우며 목축업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따뜻한 봄이 찾아오면 산속을 돌아다니며 동충하초를 비롯한 고가의 약초를 내다 팔면서 삶을 이어가고 있어요. 높은 고원지대라 그런지 사람들이 살아가기 참으로 힘든 곳이지요. 그래서인지 이들의 신앙심은 굉장히 특별하다고 할 수 있어요. 삶을 살아내기 힘든 곳일수록 의지할 대상이 이들에게는 더 필요한 법이니까요. 그래서 아까 장족 거리에서도 느꼈다시피 이들은 거의 대부분 라마불교를 믿고 있기 때문에 장족 마을 어디를 가더라도 타르쵸나 룽다가 걸린 전통 가옥과 향내 가득한 크고 작은 라마불교 사원을 손쉽게 볼 수 있지요. 이들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는 전생에 자신의 조상들이 환생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 그 어떤 생명도 소중하게 생각한답니다.”


 “혹시 그걸 윤회라고 하는 건가요?”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을 확인하려는 듯 그에게 물었다. 그러자 김 선생은 나에게서 의외의 대답을 들은 듯한 표정을 지으며 곧바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요. 잘 알고 계시네요. 우리들이 알고 있는 용어로 바꾸면 '윤회'라는 말이 맞지요. 이들은 죽음을 삶의 끝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자신의 영혼이 거쳐야 할 일시적인 과정으로 여기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경향을 보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기 마련인데, 이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에 몇 안 되는 민족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니... 그것이 제게는 참 낯설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섭기도 하네요. 마치 무슨 저승사자라도 만난 것 같네요.”

 나는 이렇게 말하면서 김 선생의 설명과 장족 거리에서 보았던 장족들의 매서운 눈빛이 묘한 조화를 이루어 약간의 두려움과 동시에 신비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데 장족들은 예전부터 중국인이 아닌 티베트인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원래 그들만의 문화나 언어 같은 것들은 아직도 여전히 남아 있지 않나요?”

 나는 장족들에 대한 호기심과 더불어, 티베트로의 본격적인 여행을 떠나기 전에 되도록 더 정확하고 다양한 정보가 필요했기에 김 선생에게 이렇게 다시 질문했다.


 “그렇죠. 이들은 원래 중국인이 아니었습니다. 원래 장족들은 그들만의 독자적인 문자와 역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중국의 왕조 중 하나인 당나라로부터 불교가 본격적으로 전래되고 난 후, 북인도에서 가져온 산스크리트어로 적힌 불경을 번역하기 위해 산스크리트어의 자모를 차용해 그들만의 독특한 언어와 문법을 만들어 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전히 수많은 장족들은 이미 중국인 국적을 가지긴 했어도 자신들의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한어보다는 그들만의 언어인 장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물론 지금도 중국 정부의 문화융합정책이 강력하게 추진되고 있긴 합니다만 그것이 얼마나 성공을 거둘지는 더 두고 봐야 할 일이지요. 언어와 문화를 바꿀 수 있을지 몰라도 이들의 신앙과 믿음까지는... 글쎄요...

어쨌거나 장족들이 믿는 라마불교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면 이들의 문화를 제대로 이해하기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이 라마불교에 대해 꼭 알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죠. 우리가 알고 있는 한국의 불교와는 아주 다른 점이 많거든요.” 그는 자신이 할 말을 조금 생각한 듯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어 나갔다.


 “라마 불교는 원래 7세기 중국의 당나라 시대의 문성공주가 당시 강성한 티베트 왕국이었던 토번 왕국의 송첸캄포 왕과의 정약 결혼을 통해 티베트로 들어가게 되면서부터 왕성하게 되었습니다. 불교가 전해지기 전에 티베트에서 성행했던 본교라는 전통 민간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이들만의 독특한 형식의 라마불교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독특한 형식의 라마 불교라고요?”

 내가 알고 있던 불교 지식이라고 해봐야 북인도의 왕자인 고타마 싯달타가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후, 그를 따르는 제자들을 통해 불경이 만들어지고, 그 후로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러한 나의 이해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김 선생은 나에게 추가적인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그렇습니다. 그들만의 독특한 형식의 불교, 그것은 어쩌면 전 세계에 존재하는 불교의 모든 종파와 지식과 철학 이론을 결합한 형태라고 보면 될 겁니다. 불교는 크게 대승불교와 소승불교로 나뉘고 아래로 수많은 종파로 나뉘면서 각 나라의 문화와 전통과 결합해 다양한 형태로 그 모습이 변화되어 왔지만, 티베트 불교는 그러한 불교의 모든 철학적 이론과 불교 수행법이 통합된, 말 그대로 불교 철학의 정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티베트인들은 그 정수의 이론을 윤회의 과정을 거쳐 대대로 전수받은 살아있는 한 인간을 ‘달라이 라마’(티베트 말로 달라이는 큰 바다, 라마는 스승이라는 뜻이다)라고 부르지요. 즉, 라마 불교의 최고의 위치에 있는 이 존재는 가톨릭의 교황과 같은, 어쩌면 그보다도 더 위대한 존대와 지위를 부여받게 됩니다.”


 김 선생은 나에게 정확하고도 학술적인 설명을 곁들여가며 말했다. 불교에 대한 정통한 이론과 역사를 섭렵한 김 선생은 언뜻 보아 불교도 승려와도 같은 신비한 분위기를 풍겼다.


 달라이 라마라는 단어는 여러 매체를 통해 참으로 많이 들어본 이름이었기에 나는 '그 단어는 여러 매스컴을 통해 국제 사회에 떠도는 자유와 독립의 대표적인 대명사이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하면서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달라이 라마라면 저도 들어 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그는 현재 인도로 망명해서, 그곳에서 티베트인 공동체를 이끌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불행히도 그 역사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그리 많지가 않네요.”

 그러한 나의 의문을 풀어주려는 듯 김 선생은 천천히 그의 말을 이어갔다.


 티베트 불교의 시작

 

 “그 역사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다시 당나라 시대의 송첸캄포 왕이 다스리던 시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당나라로부터 문성공주가 선진화된 불교를 가지고 온 후, 정치와 종교를 동시에 주관하는 제정일치의 달라이 라마라는 신적인 존재가 처음으로 등장하여 그들만의 유일한 군주로 자리 잡게 되지요. 한 명의 달라이 라마가 죽게 되면 다른 라마승들은 곧바로 얼마 후에 그의 환생자가 되는 화신(化身)을 찾게 되고, 몇 가지 증거와 테스트를 거친 후, 그 아이는 다음 달라이 라마로 선택된다고 합니다.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죽을 때까지 말입니다. 그렇게 전해져 내려온 달라이 라마가 현재 인도에 살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인 ‘텐진 갸쵸’라는 인물입니다.


 예전에 1949년부터 시작된 중국 공산당의 강압적인 티베트 침공으로 인해 티베트인들은 중국 정부에게 모든 자유와 주권을 박탈당하고 그들의 절대 군주였던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모두가 잠든 새벽을 틈 타 어쩔 수 없이 인도로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슬픈 역사의 현실을 다 설명하려면 하루 이틀로도 시간이 모자랄 겁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과 죽음들이 많았었는지, 이방인인 우리로서는 제대로 알 길이 없을 뿐입니다. 결국 십여 년간의 중공군의 끈질긴 침략으로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티베트라는 나라는 세계의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김 선생의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예전에 우리나라의 식민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네요.”

 나도 역시 그 시절 힘들고 억울했던 한 시대를 살아낸 사람처럼 뜻을 담아 혼자 말하듯 안타까운 마음을 내뱉었다.

 그러나 항상 자유와 희망이라는 가치를 지향하며 평생을 살아온 중년의 이 남자는 그러한 마음에 공감을 하면서도, 어떤 새로운 대안이라도 있다는 듯이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은 아직까지도 마음속에 진정한 자유와 독립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티베트 내부 지역에서 세상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는 크고 작은 독립운동의 움직임이 여전히 일어나고 있지요. 뿐만 아니라 티베트인들은 누군가 이들을 위해 언젠가 자유와 독립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숨겨진 희망을 가지고 날마다 기도한다고 합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그 사람이 바로 달라이 라마라고 합니다.

 이들은 기도할 때에 딱 세 가지를 위해 기도합니다. 첫 번째는 세계의 평화를 위해, 두 번째는 달라이 라마의 안위를 위해, 그리고 마지막은 자신의 깨달음을 위해.”

 순간, 마지막 한 말을 남겨둔 연사의 팽팽한 긴장감과 함께 조용한 휴지(休止)의 시간처럼 김 선생은 말을 멈추고, 전시실 안에 갇혀 있는 티베트인 모형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정치적인 독립만이 이들의 영혼에 자유를 가져다줄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정신이 사라진 티베트의 독립은 허울뿐인 껍데기일 뿐인 것이지요. 그래서 달라이 라마가 외치는 자유라는 것도 아마도 단순한 정치적인 독립이 아니라 정신적인 자유와 독립이지는 않을까 하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보아 알 수 있듯이 제가 생각하기에 티베트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나라와 민족의 독립이 아니라, 바로 이 민족의 존립과 자유가 걸린 그들 영혼의 해방입니다. 그것은 오직 확고한 진리와 깨달음으로 인해 얻게 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누구든지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일은 그리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런 일을 하고 싶네요."


 중년의 김 선생은 자신이 하는 일이 어떠한 일인지를 조금이라도 공감한 듯한 나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티베트에 관한 이야기 하면서 곧 어떤 신비한 감정으로 인해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끼는 것 같았다.


 김 선생은 마지막 말을 끝맺으며 조용한 걸음으로 전시실을 나갔다. 그는 마치 이러한 험한 길을 힘겹게 싸워온 달라이 라마의 한 제자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왠지 모를 끌림을 느끼며 티베트인들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졌고, 그들을 어서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이제 그만 돌아가죠. 폐관 시간이 다 되어 가네요.”

 오후 5시 반을 알리는 시계를 쳐다보며 김 선생이 말했다. 때마침 박물관의 문을 지키던 직원이 폐관 시간이 다 되었다고 알려 주었다.

 

 김 선생의 이야기를 다 듣자 나는 전시관 문을 나섰다. 순간, 전시실 안에 있던 수많은 불상과 전통 의상을 차려입은 장족 모형들이 살아 숨을 쉬는 듯 나에게 무엇인가를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돌려 그것들을 바라보았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형들의 표정은 한결 같이 굳어 있었다. 나는 굳게 입을 다문 모형들의 표정을 생각하며 또다시 어린 시절, 모두가 잠든 사이 인형들과 장난감들이 살아나서 자신들만의 세상을 만들어가는 그런 상상을 떠올렸던 것이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어쩌면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 느낀 것인지도 모르지만 사천 박물관에서 느낀 티베트인들에 대한 강한 인상이 이러한 환상과 착각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나는 전시실의 문을 제일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박물관을 빠져나와보니 우리 두 사람이 오늘의 제일 마지막 관람객이었던 것이다.

 박물관 밖으로 빠져나와보니 어느덧 해가 지려하고 있었다. 이제는 박물관 안에 아무도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전시실 안의 수많은 모형들이 살아나 아까 김 선생과 나눈 대화를 주제로 모형들이 많은 토론을 벌이지는 않을까 하는 오싹하지만 우스꽝스러운 상상을 하면서 박물관 출입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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