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은 다음 마을인 ‘야지앙雅江’으로 가기 전에 잠시 쉴 수 있는 조그마한 도시였다. 쪄뚜어탕춘을 떠나 이틀을 더 걸어서 도착할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 사이에 우리는 무야촌木雅村의 백탑 옆에 자리 잡은 숙소에서 하루를 머물렀는데 걷는 중간에 가지고 온 물이 다 떨어져 길 옆에 눈이 녹아 흐르는 물을 그대로 물병에 담아 마시기도 했고, 쉬었다 걷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씬두치아오로 향하는 길은 하늘 바로 아래까지 끝없이 이어졌다.
아무리 힘이 들고 갈증이 나도 우리는 씬두치아오에 가기 위해 다시 배낭을 울러 메고 길을 나섰다. 매일이 눈부신 태양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의 연속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자연과 고원의 풍광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해 보였다. 나 역시도 길을 걸으며 항상 이토록 맑고 순수한 자연 앞에 탄성을 자아내는 한 인간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길을 가다 발견한 사람들이 조금 모여 살 수 있는 작은 마을은 언제나 길을 중심으로 작은 시내를 비롯한 소규모의 농토가 있었다. 그곳에는 아마도 매년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곡식이 자라고 가을에는 풍성한 수확이 이루어지는 여느 농촌의 풍경이 있었으리라. 어느 누가 티베트는 황량하고 척박한 땅이라 하였던가. 적어도 내가 본 이곳 동티베트의 땅은 그렇지가 않아 보였다.
황량이니, 척박이니, 궁핍이니 라는 단어가 무색할 정도록 민가들은 잘 정비되어 있었고 각 가정마다 최신식 자동차나 농기계가 보급이 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야크나 말을 키우는 개인 소유의 농지도 눈이 띄었다. 무엇보다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지나가는 모든 순례자들과 여행자들에게 꾸밈없이 모든 것을 베풀어 주던 친절하고 순수한 티베트 사람들의 마음씨였다. 그렇게 길에서 만난 티베트인들을 통해 힘을 얻어 우리는 걷고, 걷고, 또 걸었다.
우리는 무야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얼마 남지 않은 씬두치아오를 향해 다시금 열심히 길을 걸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우리 외에 또 다른 사람들이 앞서 가고 있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분명 그들은 우리를 앞서고 있었지만 속도는 우리보다 빠르지 않았는지 우리들과 그들의 간격은 점점 좁혀지고 있었다. 자세히 다가가 보니 그들은 티베트인 무리였는데 거의 10여 명 가까이 되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걸어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삼보일배(세 걸음을 걷고 전신을 땅에 닿으며 절을 하는 것)를 하며 길을 가고 있었다.
그때 앞서가던 중절모가 외쳤다.
"우리가 드디어 오체투지를 하는 순례자들을 만나게 되었군."
"오체투지라고요?” 순간, 나는 무엇에 이끌렸는지 따거를 앞서 오체투지를 하고 있는 그들에게 다가갔다. 분명 나는 무척이나 지쳐있었는데도 말이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하루 종일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면 더 이상 고원의 아름다운 풍경이나 자연의 새로운 모습을 눈에 담기보다는 그저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숙소가 나타나기만을 바라게 된다. 누구나가 말이다. 나 역시도 그런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 때에 중절모가 오체투지를 하는 사람이라는 말을 한 순간, 저 멀리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길을 조금은 다르게 가고 있는 모습이 먼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비록 나의 시야에 그들이 제대로 들어오지는 않았지만 내 영혼은 멀리서도 직감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들은 좀 더 고결하고, 험난하며 위대한 길을 밟고 있는 자들, 평생을 바쳐 긴 시간 동안 변하지 않은 한 가지 숭고한 자신들만의 신앙과 믿음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자들, 사람들은 그들을 순례자들이라고 불렀다. 따거의 말에 따르면 티베트의 오체투지 순례자들은 기나긴 순례의 길에서 살아있는 것을 죽이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으며, 모든 욕망을 멀리하는 것을 맹세하고 길을 나선다고 했다.
놀라웠다! 내 눈으로 직접 이러한 티베트의 순례자들을 만나다니. 지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짧은 길보다 훨씬 더 길고 험한 길을 저들은 불손한 생각을 하지 않고 오로지 기도와 인내로 세 걸음에 한 번 절을, 그것도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땅에 엎드리며 가고 있다니. 순간 지친 내 영혼이 번쩍 깨어난 듯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언제 왔는지 내 뒤를 바짝 붙어 따라온 중절모는 오체투지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대화를 시도했다. 이들도 잠시 쉬는 모양이었는지 길옆에 텐트를 치고 식사를 막 하려던 참이었다. 그중에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한 노인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라싸로 가는 길이오. 당신들은 어디로 가는 길이시오?”
“저희들도 라싸로 가는 길입니다.” 옆에 있던 따거도 등에 맨 배낭을 내려놓고 말했다.
“우리도 여기서 잠시 쉬었다 가지. 어르신 저희들도 여기서 함께 잠시 쉬었다 가도 되겠지요?”
따거가 힘겨운 숨을 내쉬며 나이가 지긋한 노인에게 물어보았다. 그러자 지금까지 보아왔던 여느 티베트인처럼 평안한 미소와 여유로움으로 따뜻한 수유차를 대접하며 그러라고 대답했다.
이들은 언뜻 보아도 이미 오랜 시간을 거쳐 이곳까지 온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거의 대부분은 남자 성인들을 비롯한 여인들이었고, 아이들도 몇 명 있었다. 내가 그중에 몇몇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니 이들은 윈난 성의 더친이라는 곳에서 조금 떨어진 한 마을의 두 세 가정이 함께 순례길에 나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노인은 그 마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어른 중에 한 분이라고 했다.
그 노인은 최소한 70살은 되어 보였다. 그런데도 이러한 험한 순례 길에 오르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내가 들은 바로는 라싸까지의 순례길은 티베트 인들의 일생 중에 단 한번 있는 위대한 과업이다. 마치 이슬람교도들이 평생 메카에 순례를 떠나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저 노인은 평생을 사는 동안 단 한 번도 라싸까지 가는 위대한 업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뜻이 되는 것이고, 이제 곧 죽음을 가까이 두고 자신의 성불과 위대한 업을 위해 이생에서의 마지막 순례 길에 오른 것인지도 모른다.
나와 함께 길을 온 다른 일행들은 간식을 꺼내어 먹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이, 나는 어떤 이끌림 때문에 노인에게로 다가가 대화를 건네 보았다.
“어르신, 실례지만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되는지요?”
그러자 햇볕에 검게 그을린 피부에 주름이 가득한 밝은 얼굴을 띤 그 노인이 나에게 웃으며 대답했다.
“젊은이, 자네가 보기에는 내가 몇 살처럼 보이는가?”
나는 처음부터 그 노인을 본 순간 느꼈던 느낌과 생각을 그대로 말해 주었다.
“실례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제가 보기에는 예순 살은 넘어 보이시는데요.” 노인은 '허허' 하며 작게 웃어 보였다.
“고맙네. 그렇게 젊게 봐주어서. 올해 일흔여섯이라네.”
나는 놀라고 말았다. 그 정도의 나이면 거동도 불편할 나이인데, 보통의 젊은 사람들도 감당하기 힘든 오체투지를 하며 순례 길을 걷고 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다.
“어찌하여 그 연세에 이런 힘든 길을 걸어가고 계십니까? 힘드시지는 않은지요?”나는 걱정 반 놀라움 반이 섞인 목소리로 노인에게 물었다.
“힘들지. 아주 힘들지. 내가 딱 10년만 더 젊었어도 몸이 지금처럼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테지. 그렇지만 라싸를 향해 순례 길을 가고 있는 지금이 내 생애를 통틀어 가장 의미가 있는 시간이라네. 이제 내 나이쯤 되니 죽음이 정말 가까이 다가왔다는 걸 느낄 수 있어. 나는 마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으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보았다네. 나를 포함해 그들 중 다음 생애에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도 어려운데 더 이상 인생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이 길에 올랐지. 나는 사람이 언젠가는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네. 그래서 다시 태어날 그 삶을 준비하기 위해 죽음을 준비하는 것이지. 그렇지만 지금이라도 죽기 전에 이렇게 내 생애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꿈'을 이루기에는 나는 아직도 늦지 않았다고 생각 하네만...”
그 노인의 입에서 ‘꿈’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 이렇게 죽음을 앞둔 늙은 사람에게는 그 '꿈'이라는 단어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졌다. 나에게 꿈이라는 말은 이제 막 피어오르기 시작하는 젊은이나 소년들만이 가지는 전유물처럼 그렇게 싱싱한 단어처럼 생각해 왔지만, 이 노인에게서 들은 그 꿈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시간과 나이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의 가슴속에 영원히 남아 있는 궁극적인 어떤 바람이나 이상처럼 다가왔다.
내가 이렇게 혼자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 그 노인이 내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는 자네는 어디로 가는가?” 내게 무언인가 더 할 애기가 있는 듯 노인은 내 눈을 바라보고 말했다.
“저도 역시 라싸로 갑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하게 말했다.
“그럼 이 길이 젊은이에게 새로운 꿈을 깨닫게 해주기를!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 70년이 넘는 시간을 준비하면서 많은 것들을 희생하고 잃었지. 항상 가족들을 부양해야 하는 부담과 변화하는 사회의 모습 속에서 가슴속에 품고 있던 그 꿈을 지속적으로 간직한다는 것이 쉽지 만은 않은 법이지. 어떤 시절은 이 순례의 길을 떠나려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가파른 절벽 길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 버렸고, 어떤 날은 마을에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녀야 했지. 그렇게 모든 삶이 안정되기만을 기다려 순례 길에 오르려고 하다 보니 나이가 많이 들었더군. 그러다 작년에 막내아들이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되자 이제는 곧 내게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온 것을 느끼게 되었고, 더 이상 그런 세상만사에 얽매이고 싶지 않아 이렇게 길을 나선 것이지. 나는 결국 알게 되었다네. 신께서 내게 평생을 바쳐 요구하던 이 순례의 길을 떠나지 않고 머뭇거리고 있자 내게서 아들의 목숨을 대신 가져간 것이고, 내게 주어진 나머지 삶은 그러한 중생들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느끼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일세.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젊은 시절부터 알고 있었네. 내 가슴이 무엇을 원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내가 무엇을 해야만 했었는지 말이야. 어차피 죽음은 또 다른 시작이니 그것이 두렵지만은 않지만, 이 순례의 꿈을 위해 쉽게 결단하지 못했던 내게는 희생이 너무나 컸다네. 자네도 이 대지에 그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 꿈을 이룰 수 없을 걸세.”
신기한 일이었다. 세상의 끝자락, 대부분의 인생을 험한 산과 깊은 골짜기에서 살아온 한 노인이 어찌도 이리 진중하고 진리에 가까운 깨달음을 얻은 것인지. 이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진 수레바퀴에 불과했다.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것이다. 따라서 죽음을 피할 수도 없고, 피하지도 말아야 한다. 그저 단순히 그때를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라고 이들은 말한다. 그러나 내가 알고 있는 보통의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한다. 아니, 아직 경험해보지 못한 죽음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죽음을 떠받쳐 주는 것은 바로 현재의 삶이며, 그 현재의 삶에 충실하다 보면 죽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와 마음의 준비가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반드시 자신의 죽음이 찾아오기 전에 삶의 의미를 찾고 자신의 가슴이 외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 위대한 업을 이루기 위해 각자의 꿈에 과감히 자신을 모두 던질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반드시 희생과 대가가 따르겠지만 그것이 늦어질수록 인생의 후회는 더 커질 것이 분명하다. 그것이 바로 섭리였다.
이 노인은 나에게 이 분명한 사실을 깨닫게 해 주었다.
순간 나는 티베트란 땅은, 길을 걷고 대화를 나누는 평범한 모든 사람이 성자처럼 느껴지는 곳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어떤 사람도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그 어떤 인생도 교훈과 가르침이 없는 삶이 없는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은 이곳이 전 세계에서 세상과 단절되어 있는 가장 낙후된 지역 중에 하나라고 하는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에서 가장 풍족한 지역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더 많은 진리와 비밀들을 깨달은 삶을 살아내고 있는 자들이 바로 티베트인 같았다.
나는 예전에 어느 책에서 읽었던 글 하나를 떠올렸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리고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이 오는 것이다. 그 마음의 갈피를 더듬어 볼 수 있을 바람, 사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티베트인들은 내게 그런 바람이 되었다. 거대한 히말라야의 산맥과 같은 태곳적 신비를 간직한 과거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늘과 태양 같은 진리를 담은 그들의 현재의 삶이 나의 불완전한 미래의 모습을 신의 섭리와 부름처럼 완벽하게 완성시켜 줄 것 같은 그런 예감이 들었다.
나는 그 노인과의 만남이 짧은 마주침이 아니라 나의 영혼을 울린 진정한 만남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의 굳은 의지에 찬 얼굴을 바라보며, 속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 속에서 숨어 있는 신의 또 다른 얼굴을 발견한 듯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마치 흩어진 퍼즐 조각을 하나 둘 맞추어 가며 큰 그림의 윤곽을 발견해 나갈 때 느낄 수 있는 흥분과 희열 같은 그런 종류의 기쁨 말이다.
나는 다시 배낭을 메고 길 위에 섰다. 다른 사람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오체투지를 하는 노인들에게 뒤지지 않으려는 듯 해가 지기 전에 숙소가 마련된 마을로 진입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시 제일 선두에 씨아오찌엔이 서고 나는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일렬로 대열을 맞추어 씬두치아오를 향해 묵묵히 걸어갔다.
그리고 저 멀리 뒤쪽에서는 그 노인을 선두로 그들 역시 다시 길 위에서 오체투지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어렴풋이 알 수가 있었다. 그 노인이 입술을 움직이며 모든 생명을 태동케 한 대지와 영혼의 아버지가 되는 신에게, 또한 모든 인생들의 고통과 아픔을 대신해 라싸에 도착할 때까지 저렇게 기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설령 저 노인이 길 위에서 죽음을 맞이할지라도 그것이 그에게는 아무런 후회도 장애도 고통도 되지 않으리라는 것까지도.
나는 다시 앞을 향해 길을 걸으며 나도 모르게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옴마니에밧메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