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생각 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즈 Nov 06. 2021

정신분석학의 시작은 나의 내면에서부터

어린 시절의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부터 현재까지


-나의 어린 시절 가장 충격적인 사건.  


7살이 된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분명치 않은 어느 날 밤에 얇은 반투명 빗살무늬 미닫이 유리문 사이로 아버지에게 온갖 욕을 해대며 소리를 지르고, 불같이 화를 내던(아버지 역시도 같은 모습이었고, 결국에는 접시며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났다) 어머니의 모습이 내 기억 속 마지막순간이었다.

  

 그 공포에 소리 없이 숨죽여 울고 있던 우리 두 형제는 얇은 미닫이 유리문이 언제 열릴지 모를 두려움과 이유와 원인을 알 수 없는 혼란에 어찌할 바를 몰라 오로지 두 육체를 의지한 채 울고 있던 그 기억이 30년이 더 지난 지금까지도 내 머릿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다.


 그날 이후로 나는 어머니의 목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그 당시 이혼한 가정은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군다나 어머니가 아닌 아버지가 아들 둘을 키우는 집은 더더욱 흔치 않았다.


 그 후 우리 형제는 몇 달간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본 적없는  친척들 집을 전전하며 눈칫밥을 먹어가며 매일 밤을 소리 없이 울먹였다. 나는 최초로 슬픔이라는 진짜 감정과 부모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체념, 그리고 죽고싶다는 자살충동을 동시에 느끼게 되었다. 겨우 7살이 된 꼬마 아이가 말이다.





 -충격적인 사건이 아로새긴 인간의 선명한 기억력


 우리 형제는 울타리 없는 들판과 거친 광야에 내던져진 망아지 같이 자랐다. 가족이라는 분명하고도 따뜻한 울타리를 느껴본 적도 없었고, 훈계도, 질서도, 감정도, 정서도 불안정한 상태로 육체와 지식과 경험만이 성장했다.


 인간의 감정이 기억되는 최초의 시기는 보통은 5세에서 7까지인 것 같다. 그냥 좋았다, 나빴다, 싫었다, 무서웠다와 같은 그런 사소하고도 일상적인 감정과 경험들은 그렇게 사람의 기억 속에 사무치도록 각인되지는 않는 듯하다.  그런 것들은 어떤 사건이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시기의 어렴풋한 아지랑이 같은 느낌으로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런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면 그 사건이 일어났던 모든 사소한 것들이 인간의 기억력 속에 기이하리만큼 정확하고도 세밀하게 아로 새겨진다.


 나는 그날의 습도와 안방에 널브러져 있는 붉은 털 이부자리와 옷가지들, 물건이 깨지고 소란스러운 다툼의 소리의 끝이 한없이 길게만 느껴진 얼마간의 침묵 후에 집안으로 들이닥친 외할머니와 친척들의 분주한 발걸음을 지금도 선명히 기억한다.


 

 


 -유아기와 청소년기를 사로잡은 죄의식의 단초


 국민학교 입학식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1학년 담임 선생님이 나를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뭔가 불쌍한 눈빛으로 잘 보듬어주고, 내가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크게 혼내지 않았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나는 항상 의기소침해 있었고, 뭔가 내가 잘못했기 때문에 내 속에서 그 당시 어린아이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모습의 감정들이 뒤섞여 있었다. 그런 감정들이 훗날 나의 '죄의식'에 대한 인식의 뿌리가 되는 감정이 되었던 것 같다.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네 부모는 이혼을 한 것이고, 주위 사람들의 눈치와 시선을 신경 쓰게 된 것이고, 무엇을 하든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고!'라고 말이다.


 고학년이 되어갈 때 즈음에 어느 정도 혼자서 모든 일을 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게 되었기에 이혼한 가정에 대한 부끄러움과 수치심만 남았지 금세 더 가난해지고, 초라한 집안 분위기에 적응하게 되었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나는 그 상황과 환경에 이유를 던지기를 포기하고 순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집 안을 벗어나 집 밖으로 나다니기 시작했다.


집 안에서 누구 하나 통제하는 존재가 없었으니 동생과 나는 밤이 늦도록 온 동네를 쏘다니며 동네 친구들과 노는 재미에 빠져 그나마 즐거웠던 유년 시절을 보내었다.


자연스럽게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서는 불편함이 생기기 시작했다. 아이의 지식과 지능과 경계가 확장되어 갈수록 그 마음 안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차지하는 부분은 점점 줄어들었다. 때로는 집 안이라는 공간에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으면 왠지 낯설고 쉽게 무슨 말이라도 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 반복됐다. 원래 말수가 없는 경상도 분인 데다가 나이가 들수록 더 쇄약 해져 가는 육체의 병 때문에 우리에게는 더 말이 없으셨다.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해 객관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정말 대화다운 대화를 나눈 것은 내가 느지막이 군대를 다녀왔을 때였다. 25살에 군에서 휴가를 나와 회 한 접시에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며 나눈 대화가 아버지라는 존재와 인격을 마주한 첫날이었다.


 아버지는 시골집 가난한 목수의 7남매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아버지가 7살이 되던 해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그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큰 형님과 나이 차이도 20살도 더 많이 차이가 난 늦은 막둥이였다. 가난한 형편에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해 초등학교도 다니다 말았었다. 그러한 아이가 부모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 어린 시절을 지내고 성인이 되어 늦은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으니 어찌 자식에 대한 사랑 표현과 관심을 가지는 방법을 알 수 있었으랴?


 그렇게 생각하자 어린 시절의 나의 이유 없는 죄의식과 불우했던 과거의 환경이 조금은 위로가 되었고, 아버지라는 존재가 한 인간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아이의 불안정한 정서의 표현은 눈물을 통해 해소한다.


 7살의 그 충격적인 기억이 남은 시절에 친척집을 전전하며 밤마다 나는 그 뜻도 제대로 모르는, 어디선가 주워 들어 가사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던 군가를 계속 조용히 부르며 자신 안에 해소되지 않은 불안전한 감정과 슬픔을 억지로 눈물로 풀어보려 그렇게나 많이 울었던 것 같다. 슬프고 서러워서 울었다기보다는 울음이라는 행위를 통해 내 안에 해소되지 않고, 제대로 정의할 수 없는 감정 덩어리를 해소하기 위해 우는 행위를 반복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해가 거듭할수록 우는 횟수가 줄어들고, 결국에는 바로 몇 해 전에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건의 기억은 망각해 버리고 말았다. 그것보다는 매일 일요일 아침에 방영했던 디즈니 만화와 학교 친구들과의 축구 시합이나 노는 것이 더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다. 어느새 나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 소년이 되어 있었다.


 곧 40대를 바라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감정이 거의 메말라 눈물을 흘려보려고 해도 거의 잘 되지 않는 그런 지경이 되어 버렸다.


 나 역시도 나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경험해 보지 않은 채 거친 광야와 들판을 돌아다니다 늦은 나이에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만들게 되었다.


 결혼을 하고 첫 아이가 세상에 태어나 우렁찬 울음을 터뜨리던 그 순간 몇십 년 동안 막혀있었던 나의 눈물샘이 터졌다. 그것은 그전에 내가 흘렸던 눈물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감정에 기인한 눈물이었다. 기쁨과 행복, 그리고 신비였다.


 그 아이가 지금은 6살이 되어서 자기보다 쌍둥이 동생들을 더 많이 놀아준다고 하루에도 수십 번씩 토라지고, 눈물을 흘려대는 인격체로 자라고 있다.


 아이들이 우는 것은 자연스럽고도 꼭 필요한 행위이다. 어린 아이들의 내면 속에는 스스로도 정립시킬 수 없고, 아직까지 이해할 수 없는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일렁이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때로는 소리를 지르고, 때로는 떼를 쓰고, 또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한 우는 아이에게 울지 말라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마음속에 정립되지 않은 감정의 골이 더욱 깊어져서 무의식에 각인되어 나중에 성인이 되었을 때 더욱 불안전한 정서로 나타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무조건 모든 상황에서 울음으로 대처하게 해서는 안 되겠지만 울고 싶은 상황에 직면했을 때나 자신의 감정을 해소할 방법을 찾지 못할 때는 충분히 울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가 사랑으로 있는 힘껏 안아주라. 진심 어린 포옹은 아이의 아픈 마음을 수용해주고받아주고, 용서해 준다는 최고의 표현이니까.


 그러면 아이는 아직까지 스스로 정의할 수 없는 그 이상한 감정의 시발점이 자신의 잘못이 아니었음을 깨닫고 나와 같은 죄의식에 사로잡힐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다. 나는 그냥 계속 울기만 했다. 누구 하나 따뜻하게 그 눈물을 안아줄 부모의 품이 없었기에 그 이상하고도 나쁜 감정은 나에게서 시작되었다고 나의 무의식은 인식하게 된 것이다.




 -부모의 싸움에 아이의 감정은 요동친다.


 나와 기질도 전혀 다르고, 성격도, 배경도, 환경도 완전히 다른 나의 아내와 (대부분의 부부가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나는 쉽게 싸우게 된다. 물론 해가 거듭할수록 그 횟수가 점점 줄어들고 있고, 또 큰 싸움으로 커지기 전에 서로 먼저 피하는 법을 터득하고 있어서인지 싸우는 날이 더 적어졌다.


 며칠 전에도 세 아이의 육아와 나의 취업 문제 때문에 아이들과 집 앞 바닷가로 산책을 나갔다가 서로 고래고래 소리를 높여 싸우다 집으로 돌아왔다. 서로의 감정이 격해지고 목소리가 높아지자 큰 딸아이는 점점 말이 없어지고, 의기소침해져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를 몰라 땅만 보고 걷는 것이었다.


 아이들 앞에서는 싸우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말자는 서로의 약속은 이렇게도 지키기가 어려운 공약이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그날 밤 곤히 잠이 들어 있는 딸아이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어린 시절 울다 지쳐 잠이 든 나의 모습이 생각났다.


 '이 아이도 지금 자신도 모르는 감정에 휩쓸려 어찌할 바를 몰라할 수 있겠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6살이면 아직도 한참이나 어린 아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짚어보니 6살이면 충격적인 사건이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각인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정신이 번쩍 뜨였다.

  

 그래서 요즘 부쩍이나 더 떼를 쓰고, 별것도 아닌 일이 울음을 터뜨리고, 쉽게 흥분하고, 동생을 괴롭히는 빈도가 더 늘어난 것이었을까?

 

 순간적이었지만 나는 아버지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했던 나의 결심이 깨어지고, 나의 모습 속에서 어린 시절 내가 보아왔던 아버지의 모습이 투영되어 거울 속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다음날, 나는 딸아이와 함께 동네 놀이터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제 아빠와 엄마가 싸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어보았다.  


  6살짜리 작은 딸아이는 머뭇거리며 내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아빠 나빠, 그리고... 나도 나빠!"라고.

 그러곤 곧 눈물을 터뜨렸다.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그랬다. 부모의 싸움을 바라본 아이의 감정 속에는 자신의 잘못 때문에 그 싸움이 일어났다는 그런 죄의식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얼른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하고 아빠는 이제 화해했어. 그리고 이제는 다시는 네 앞에서는 싸우지 않는다고 약속할게. 네 마음 아프게 해서 미안해. 그리고 엄마 아빠가 싸운 건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로, 네 잘못이 아니란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서 아이를 꼭 끌어안아주었다. 그제야 아이는 눈물을 멈췄다. 그 순간 내 안에 숨어있던 꼬마 아이도 눈물을 멈추고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러니 이제 그만 울어도 돼.'라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