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보다 소중한 건 바로 나 자신이야
주말은 일을 쉬면서 이틀동안 흐른 겨울 하늘을 탓하며 온종일 집안에서 아내와 함께 세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재우다가 끝이났다. 아이들과 함께 집안에 있는 동안에는 온전히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가 없다.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나의 내면을 들여다 볼 시간이 없다는 의미와 같다. 나는 하루 중 시간을 내어 조용히 나의 내면을 한 번쯤은 꼭 들여다 보아야 하는 사람이다.
예전에 들었던 애기가 생각이 난다. 서울에 사는 평범한 40대 직장인이 혼자 있는 시간은 회사 화장실에서 똥을 누고 있는 바로 그 순간뿐이라는 애기...정말로 공감이 가는 말이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미치듯이 지옥철을 타고 회사에 출근해 서부장, 김과장, 이대리에 부딪혀 치열하게 일하다 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빠다!"라고 소리치며 달려드는 두 아이들을 놀아준다고 바쁘고, 아이들이 잠이 들면 집에서 애 보느라(혹은 다른 일터에서 일하느라 지쳐있는) 아내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느라 피곤하고, 결국 뭘 좀 하고 자야지 하는 생각만을 품은 채 오늘도 파김치가 되어 잠이 들고 마는 하루.
나의 내면의 공간에는 지금 무엇이 존재하는가?
현실의 벽 앞에 낮아진 자존감.
얼마 전에 꿈을 꾸었다. 대학 시절, 아무도 들춰보지 않은 것 같았던 장기보관서고에서 찾아내 읽었던 프로이트의 두터운 책 <꿈의 해석>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
'꿈은 자신의 억제되고, 절제된 욕망이 분출되고 해소되는 공간이다. 따라서 현실에서 이룰 수 없었고, 억눌려 있던 욕망이 꿈이라는 공간 안에서 마치 현실처럼 이루어져 억눌려 있던 욕망을 조금이라도 해소하려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다.'
라고 말이다.
그래서인지 요즘 기분좋은 꿈을 자주 꾼다. 단지 잠에서 깨어나고 몇 시간만 지나고 나면 그 꿈의 내용은 전부 잊어버리지만 그래서 그 꿈에서 느꼈던 행복감과 만족감, 혹은 성취감의 잔상만은 아련하게 남아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에 전교 회장 선거를 하고 있는 교실로 돌아갔다. 나는 몇 몇 후보들이 자신이 왜 꼭 전교 회장이 되어야 하는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내가 이 후보들과는 다른 열정 가득한 신념으로 (마치 내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모든 사람들이 나를 전교 회장으로 뽑아줄 것 같은 확신이 드는 감정을 느꼈다) 웅변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그 웅변을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마치 내가 전교 회장이라도 된 듯한 만족감은 느끼게 되었다.
잠에서 깨어나 곰곰히 생각해 보니 나의 현실은 그와는 전혀 반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가장 가깝게 생각되는 아내에게 나의 존재와 능력을 인정받고 싶어했고, 더 나아가 앞으로도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경제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은 욕망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러나 현실은 참으로 암울하고 암담하다. 통장 잔고에 돈은 점점 줄어들고 있으며, 예전에 비해 고정적인 직업에 안정적인 수입도 없어졌고, 여기에 세 아이들은 점점 자라나 필요한 것이 더 많아지고 있다. 그나마 인천집에 묵여있는 몇 억원의 돈이 위안이 되지만 집을 당장 처분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에서는 전혀 쓸모가 없는 거래정지된 증권에 불과하다. 여기에 더해 나의 풍부했던 감성과 정서는 사막에 뿌려진 한 바가지 물처럼 점점 타는 듯이 증발해 버렸다.
이러한 주변 상황이 나의 자존감을 지옥의 문턱까지 끌어내린 것만 같다.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 말하길, '이곳에 들어오는 자여. 희망을 버려라.'라는 말처럼 지옥은 곧 희망이 없는 곳이리라. 그러나 감사하게도 내 안에 희망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그 희망을 붙잡고 있는 의지가 점점 쇄약해지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염려가 있을 뿐이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확신.(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그 누구도 과거의 시간에 미리 알 수 없기에 불확실함의 영역이지만, 미리 예측해 볼 수는 있다. 앨빈 토플러는 그의 저서 <제 3의 물결>과 <부의 미래>를 통해 미래에 예측가능한 지구촌의 큰 흐름들을 예견하였다. 대학 시절에는 무슨 이런 두꺼운 책이 재미가 있나 하고 큰 감흥없이 읽었던 기억이 나지만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대한민국의 경제 활동을 하고 있는 중년의 한 남성이 다시 이 위대한 예견을 읽다보니 전에 발견하지 못했던 대단한 예측에 상당히 놀라게 되었다. <부의 미래>는 2006년에 초판이 한국에 출간되었는데 내가 대학 3학년 시절이었기에 교양을 쌓기 위한 목적으로 읽었었다. 그러나 지금 나의 경제적 관점과 세상을 향한 시각과 식견을 어느 정도 갖추고 나서 다시 이 책을 들여다보니 충분한 공부와 거시적인 관심이 있다면 미래의 큰 흐름들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하겠다라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가 과거에 예측했던 미래의 모습(지금은 이미 과거가 된 현실의 모습이겠지만)은 시간, 공간, 지식의 무한한 확장이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유튜브, SNS, 넷플릭스와 같은 OTT 서비스 등을 통해 시간에 제약받지 않고 무엇이든 필요한 영상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며, 집이건 카페건 공원이든 공항이든 인터넷에 연결된 스마트폰만 있으면 그 어떠한 공간에도 제약받지 않지 않으며 거의 모든 경제적 활동과 일상생활이 가능해졌다. 마지막으로 지식인데, 이 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있다. 부의 미래는 바로 확장된 지식에서 나온다고 말한다. 단순히 정보를 제공하는 데이터가 아닌 간접적이든 직접적인 체험을 통한 지식기반 산업에서 모든 부가 창출된다고 말한다. 실제로 세계의 대부분의 돈이 몰려있는 미국 주식시장의 시총 10위 안에 드는 기업들을 살펴보면 과거 산업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부를 창출했던 회사들보다는 마이크로소프트,메타(페이스북), 알파벳(구글), 애플, 앤비디아 등등이다. 모두 현실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 기반을 둔 산업들인 것이다. 엘빈 토플러라는 미래학자는 이미 우리의 시대에는 현실로 이루어진 사실을 과거의 시간대에 거의 정확하게 예측해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와 같이 천재적인 재능와 지능을 가지고 있지는 않기에 그처럼 정확하게 미래를 예측할 수는 없겠지만 그와 같은 천재적인 사람들의 예측이 담긴 정보를 찾아 읽기만해도 우리 세대의 미래는 어느정도 예측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인간의 내면 한 구석에는 왜 여전히 미래에 대한 불안이 남아 있는가하는 질문이 내게 남아 있었다. 이 물음은 미래에 대한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생활에 대한 불안감에 관한 질문이 아니라 어떤 진리와 영적인 것에 대한 물음이라고 볼 수 있다.
젊은 시절 나의 세계관에 큰 영향력을 끼친 인물 중에 한 사람을 꼽아본다면 영국의 영문학자이자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 소설 <나니아 연대기>의 저자인 C.S.루이스이다. 그의 유명한 기독교 서적 중 대표작인 <순전한 기독교> 제 1권 5장의 제목이 [우리의 불안에는 이유가 있다]이다. 거기서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이 진리를 구한다면 결국 위안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안 그 자체를 구한다면 위안도 진리도 얻지 못한 채, 오로지 감언이설과 몽상에서 출발해서 절망으로 마치고 말 것입니다..."
사람마다 자신이 추구하는, 혹은 정의내린 진리라는 것이 다 다를 것이다. 나는 그 중에 무엇이 옳고 그르다를 놓고 논쟁하거나 주장하고 싶은 마음은 이제는 추호도 없다. 다만 개인이 가진 다양한 가치관의 중심에 있는 진리를 확고히 붙잡고 살아간다면 그 내면에서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불안과 염려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님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럴 때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자신만의 확신을 가질 수 있는 법이다라고 본다.
나의 내면에 불안이 존재하는 이유를 찾고, 그것에 대한 생각의 정의를 내리면서 결국 중요한 것은 위대한 경제학자의 이론과 예측이나 다양한 종류의 진리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다. 누가 무슨 이론과 진리를 이야기하든 그것을 받아들이고 선택하는 존재는 바로 나 자신이다. 나 자신을 먼저 돌아보고 사랑하고, 고귀하게 대할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과 편견이 달라질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당장 자신과 관계되어 있는 그 어떤 사람들을 위한 활동과 생각들을 잠시 멈추고 자신의 내면에는 지금 과연 무엇이 존재하고 있는지부터 확인해보고 정의내려 볼 필요가 있다. 지금 같이 복잡하고 급변하는 세상에서 굳은 심지처럼 견고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간이 더욱 절대적으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