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랑 그날 웃으면서 악수도 하셨잖아요?! 그런데 ...
드디어 내게도 미국에서 첫 아르바이트를 구할 기회가 온 것인가!
그녀와 약속한 면접날이 되었다. 이민 간다고 한국을 떠난 지 약 2달이 좀 넘은 시점이라, 아직까지 한국에서 보낸 짐이 오지 않았다. 맨날 운동복 바람으로 편한 옷만 걸치다가, 오늘은 옷장에서 가장 단정해 보이고 말끔한 옷을 꺼내 입었다. 미국에 온 뒤로 단기간에 그간 말로는 다 표현 못할 고생을 해서인지 군데군데 햇빛을 못 받아 다 죽은 잔디처럼 희끗하게 늘어난 흰머리를 가지런히 빗으며 칙칙하게 늙어가는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웃을 일 없던 지난날을 뒤로한 채 애써 웃어 보이며 미소도 지어보았다.
이민을 준비하며 가볍게 생각했던 다짐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다.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가던 마트에 오늘은 구직자로서 당차게 입장하여 고객센터 쪽으로 갔다.
"오늘 인터뷰가 있어서 왔는데요."
직원은 어디론가 전화를 하더니, 나를 한 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화려한 액세서리를 한 흑인 여자가 나를 맞이하며 자신이 이곳의 보스라고 소개했고, 우리는 그렇게 첫 만남으로 악수를 하며 마주하게 되었다. 그녀를 보자마자 나 역시 미국 스타일의 미소를 장착한 채 목소리톤을 한참 올려, "Hi! Nice to meet you and thank you for the opportunity to meet with you."라며 내향으로서의 최대한의 에너지를 뽑아내어 밝게 인사했다. 그녀도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리듬을 구사하며 입꼬리가 찢어질 듯 미소를 띄웠고, 그렇게 둘만 남겨진 방은 서로 다른 이방인들의 억지 텐션이 최대한 올라가 있었다.
긴장한 나머지, 구직을 위해 괜히 종이에 이름을 써았는데 전화를 주어서 고맙다는 둥, 며칠 전에 내가 주차장에 공고를 보고 방문했었다는 등 내가 이곳에 관심이 많다는 걸 알리기 위해 주절주절 묻지도 않는 말을 먼저 내뱉었다. 그걸 또 잘 받아주며 맞장구쳐주다가 잠시 뒤, 조금 근엄해진 표정으로
"이제 인터뷰를 시작해 볼까요?"라는 말과 동시에, 나는 자세를 고쳐 앉으며 비장한 표정으로 인터뷰에 임했다.
물론, 내가 미국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으니, 잘 못 알아들으면 다시 물어봐도 되냐는 소심한 허락을 구하며.
지원서를 제출한 게 아니라서 일단 나의 신상정보를 적고, 그 내용에 대해 묻기 시작했다.
합법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비자를 가지고 있는지, 미국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지, 또 집주소가 어디인지. 집주소를 물을 때는 마트 근처라서 언제든지 일을 하러 올 수 있다는 점을 어필하니 굉장히 좋아했다.
기억나는 인터뷰 질문과 대답은 대략 이러했다.
-Service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 서비스는 기본적으로 남을 돕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곳 손님들이 쇼핑을 할 때 도움이 필요하면 즉시 달려가서 문제를 해결해 주는 거라고 생각한다.
대충 쉬운 단어를 이어 붙어서 대답했는데, 내 눈에는 꽤 만족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며 점점 자신감이 생겼다.
-마트에서 일해본 적은 있는가?
: 나는 20년 동안 전업주부로서 일을 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아이도 커가고 미국은 일할 기회가 많다고 해서 이제 시작해보려고 한다. 마트에서 일한 적은 없지만, 음식을 사러 자주 오는 곳이기 때문에 언제 와도 편안한 곳이다.
-만일, 손님이 바닥에 계란을 떨어뜨렸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 손님에게 바로 달려가서 괜찮냐고 묻고, 종이타월과 걸레를 가지고 와서 바로 닦을 거다. 그리고 같은 새 계란을 고객한테 드릴 거다.
그냥 누구나 찌르면 툭하고 나올 수 있는 너무 상식적인 질문 같아서 어렵진 않았지만, 순간적으로 빠른 생각과 판단을 한 뒤에 이걸 영어로 해야 하니, 그게 좀 어려웠다.
어떻게든 이곳에서 일을 하고 싶었고, 쉽게 온 기회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나의 최대한의 적극성을 어필한 결과, 그녀는 그 자리에서
"I would like to offer you a cashier job. Please let me know your availability, and I will take care of the application process.
(너에게 캐시어 잡오퍼를 제안할게. 근무 가능한 시간을 알려주고, 지원 과정은 내가 처리하겠다."
내 귀엔 Job Offer만 들리고, 뭔가 긍정적인 사인임을 듣고 너무 좋아서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굽신굽신 인사를 했다. 하지만, 그녀가 내게 적어달라고 건네준 근무 가능한 시간 리스트를 들고, 시간을 썼다 지웠다 하니, 깨끗하게 다시 써달라며 새로 종이를 주기도 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 나올 때 마음이 다르다고, 막상 주말에 일할려니 손이 그 요일에는 잘 가지 않았다. 질문이 있으면 뭐든 하라는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조심스레 물어보았다.
주말에도 일해야 하는 거 맞죠?
이런 마트는 주로 주말이 바쁘기 때문에 그때 근무하는 걸 선호한다.
그래, 미국에서 새롭게 인생을 살아보는거지 뭐.
그동안 주말에 실컷 놀았으니, 이제는 일 좀 해보자.
그녀는 내게 Background check 진행에 관련한 이메일이 갈 거고 그게 문제가 없으면 곧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를 했다.
이메일로 잡오퍼를 수락 여부에 대한 안내가 오고, 시급이 주차장에서 본 Up to $xx 달러에서 많이 내려간 시급이었지만, 무경력이 그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잡오퍼를 수락하자, 이메일로 background check에 대한 안내가 왔고, 그 사이트에 접속하여 개인 정보 작성을 하고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보통 1주일이면 나온다고 했는데 1주일이 넘어도 결과 연락이 없어서 인터뷰를 봤던 보스와 Follow up 이메일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 background check의 결과와 최종 오퍼가 급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다른 곳에서도 연락이 왔기 때문에 선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드디어 2주쯤 지났을까? Background Check 결과가 나왔는지 오리엔테이션을 담당할 내 직속 슈퍼바이저로 예상되는 이름과 함께 회사로부터 공식적인 잡오퍼 메일과 오리엔테이션 관련 안내 사항이 전달되었다. 첫날 작성할 I-9(근로자 신분 확인서)에 대한 안내, 입사 첫날 가지고 와야 할 서류 등과 복장에 대한 안내가 있었는데, 이제 갓 이민을 온 이민자는 I-9은 또 뭔지, on boarding은 또 무슨 뜻인지, 매 순간순간이 난관에 부딪혀 그 문을 뚫어야 하는 관문을 통과하는 느낌이었다.
이제 출근만 하면 된다!! 그런데 예상 못한 일이 벌어지고야 말았다.
그들이 정한 Tentative start date(임시 출근일)가 다가와서 정확한 출근 날짜를 물어보기 위해 이메일을 보냈는데 자세한 답변 대신 짧게 한 줄로, "메일을 이제야 봤다. 확인해 보겠다."라고 오며 회신이 좀 늦거나, 두 번째 Follow up 메일에도 내가 메일을 보낸 사람으로부터 "곧 답을 주겠다, 내가 네 매니저가 될 거다" 등 Yes / No도 아닌 애매한 답으로 사람을 기다리게 하기 시작했다.
인터뷰를 보고 잡오퍼를 받고, 백그라운드 체크까지 끝나고 최종 오퍼와 Welcome letter를 받은 상황까지 총 15일이 걸렸고, 임시 출근일로부터 10일간 대답 없는 연락을 기다렸다. 기다리다 못해 2주가 되던 날, 인터뷰를 보았던 보스에게 메일을 보냈지만, 답이 없었다.
이런 일은 또 처음이라 꾹 참고 기다렸다.
'너무 보채는 것 같은 인상을 줄 수 있어.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리자.'
보스에게 마지막으로 20일을 더 기다리다가 현재 총상황을 정리하며 내가 다음으로 어떤 절차를 따라야 하는지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계속해서 답은 오지 않았다. 점점 불쾌해지고, 기분이 언짢아지기 시작했다.
"에잇, 뭐 이런데가 다 있어! 최소한 연락이라도 줘야 하는 거 아냐?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다른 데 오퍼 거절을 안 했지."
당장 찾아가서 묻고 싶은 마음을 꾹 참으며 고스팅 당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애를 썼다.
하지만, 인생은 또 다른 기회가 온다. 그 잡오퍼를 선택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고, 그 잡오퍼가 끝내 이어지지 않으면서, 나는 예상하지 못했던 더 좋은 기회를 손에 쥐게 되었다. 순간 모든 걸 다시 잃은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이, 결국은 더 좋은 방향으로 나를 데려가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그곳을 지나면서 이야기한다.
저기 갔으면 어쩔 뻔했어? 답장을 안 줘서 너무 고맙다고.
대문 사진 : Unsplash, Volodymyr Hryshchenk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