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로 코로나 패배 3년 만에 막을 내리다.
작년 12월, 2022년 12월은 중국 체류 기간 사상 최악의 한 달이었다. 어떻게든 어떠한 방법을 써서라도 통제를 해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지는 걸 막고, 제로 코로나에 성공했다는 최초의 나라가 되고 싶었던 중국은, 이대로는 더 이상 못 살겠다며, 쌓여있던 묵은 감정을 터트려버리는 거센 인민들의 저항에 백기를 들고야 말았다.
막차를 탄 위드 코로나 선언과 동시에 우리는 3년 만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매일 하던 코로나 검사와 코로나 통치로부터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완전 일상으로의 복귀는 올해인 2023년 4월 전후였던 걸로 기억한다.
하지만 자유와 동시에 통제가 풀어지자마자, 곳곳에 숨어있던 코로나 바이러스는 급속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고, 동시에 전체 인구의 약 70% 정도가 동시에 코로나에 걸리는 최대 코로나 보유국이 되었다.
불과 1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그렇게 끔찍한 악몽일 수가 없었다. 미디어에서 보이던 우한의 아파트 주거지 봉쇄와 사재기가 휩쓸고 지나간 텅텅 빈 마트, 갑자기 쓰러지는 코로나 환자, 코로나를 숨기려다가 공안에 잡혀서 끌려가던 모습, 베이징에 사는 우리로서는 충격과 공포의 도가니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었다. 그에 따른 스트레스도 3년간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었다. 하늘길이 막힌 채 살던 3년의 지옥 같은 쓴 맛을 봤던 시기이다.
개인적으로 오싹했던 순간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위챗페이나 중국 택시인 Didi의 번호를 추적하고, 차량의 GPS를 추적하여 갑자기 주민회나 공안 쪽에서 모르는 중국 말로 전화가 오기도 했다.
너희 언제 그곳, 코로나 환자가 발생했던 곳, 거기에 방문했지? 너의 정보가 잡혔어.
심지어 가지도 않은 곳, 차량을 타고 지나갔던 곳, 계속 걸려오는 알아듣지도 못하는 전화에, 무서운 협박 비슷한 문자가 오면, 그걸 아니라고 해명하기 위한 또 다른 불필요한 노력들, 중국이 아니면 겪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택시와 대중교통을 끊어버림으로써 자차가 있지 않으면, 동네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매어 두기도 하고, 병원을 가야 하는데 차량이 없어서, 버스를 타고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서, 택시를 잡을 수 있는 그곳에서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기도 했다. 택배가 막힌다고 해서 한인마트에 야밤에 굶어 죽을까 봐 30만 원어치의 장을 봐서 혹시나 받지 못할까 봐 마음 졸였던 순간, 또 마트 사장님의 배려로 그 마트에 있지 않은 미역과 당면을 타 한인마트에서 직접 구매하셔서 배송해 주셨던 기억들.
심지어 저녁 산책을 하고 있다가 발견된, 단지 밖의 컨테이너 부스 설치와 철조망으로 나가지 못하게 막은 게이트들에 식겁했던 기억도 있다.
우리 쥐도 새도 모르는 사이에 봉쇄된 거야? 갇힌 거야?
사실 봉쇄가 되었을 때도, 단지 안에서는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 무섭고 무거운 분위기를 어떻게든 이겨내려고 하는 모습 같았다.
당시에는 남편이 출장을 가도 그쪽 지역이 통제되어 버리면 몇 달을 집에 돌아오지 못하거나, 베이징에서 타 도시에서의 이동을 막아서 코로나 세탁을 위해서 청정 지역을 찾아서 2주를 머무르고 오기도 했다. 출장을 가자마자 그 지역이 봉쇄가 되어서 매일 같이 목이 헐도록 코로나 검사를 하고, 전날 맥도널드를 시켜 먹었는데 배송기사가 양성이 나와서 갑자기 호텔 측에서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방문에 센스를 붙이기도 했다.
코로나 발생 지역에 혹시라도 가면 가면 내 위챗의 베이징 건강마인 '지엔캉바오'에 나의 GPS가 추적된 기록으로 나는 입장에서 제외되어야 했던 날도 있었다. 그냥 삶 자체가 무서웠다.
갑작스러운 봉쇄 소식에 집에서 대파와 야채를 키우고, 갑자기 시작된 소작농하는 중국살이 한국 아줌마였다. 말이 안 통해서 방울토마토까지 사 오고, 또 생각보다 잘 자라는 야채들에 소소한 재미를 느끼기도 했다. 아이한테도 학창 시절의 어디서도 경험할 수 없는 다이내믹한 하루하루였다.
14억 인구수를 자랑하는 중국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에 걸렸을 경우의 사후 처리가 중국 정부는 두려웠을 수도 있다. 실제로 한 번에 모두가 걸려버린 코로나로 열악한 병원 시설의 중국 실체는 그대로 드러났다. 중국의 병원은 이미 마비상태였다. 약국도 문을 닫고, 사람들은 생으로 코로나를 견뎌내야했다. 로컬 병원의 문 턱이 높은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외국인 병원을 이용한다. 가격이 사악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전염성이 강하고 빨랐기에, 코로나에 걸린 환자들이 무서운 병원들은 속속히 문을 닫고, 큰 병원들은 환자 진료 간 시간 간격을 두고, 발열클리닉에서만 진료를 했다. 하지만 한 환자를 진료한 후에 소독 관리하고 진료가 진행되었기 때문에 대기 시간은 3-7시간이었다. 이런 병원은 링거를 놔주지도 않았으므로, 기력이 없어서 수액을 맞고 싶어도 갈 곳이 없었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병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부분 코로나에 걸렸기 때문에 진료가 어려운 상황이었고, 또 그 속에서 피어나는 정으로 교민들을 위해서 약을 만들어서 배송하기도 하고, 코로나에 감염되었어도 환자를 받기도 하고, 그때 환자 입장에서 보는 참의사의 진면목이 제대로 판가름되었던 것 같다.
외국인들의 위챗 단톡방, 한국인들의 위챗 단톡방, 단지 단톡방 등 여기저기 코로나 커밍아웃과 약을 구하기 위한 애처로움이 여기저기서 느껴지고, 누군가 약을 구하면, 약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자신의 약을 주겠다고, 집 앞에 걸어놓고 간다고 빨리 완쾌를 빌고, 단지 관리사무소에서도 여분의 약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이웃들을 위해서 기부해 달라는 톡도 올라오고, 모든 이웃이 하나 되어, 한국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다. 중국 정부의 이기적인 통제 정치로 인한 피해는 모두 그 나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몫이었다.
코로나 태풍으로부터 1년이 지난 지금, 언제 그랬냐는 듯이 고요하다. 1년 전에 그날이 마치 꿈이었던 것처럼, 모든 게 정상적으로 돌아왔다.
코로나 시기에 중국살이를 하며 생긴 '건강염려증'으로 남모를 고생을 많이 했고, 코로나에 감염된 후 몇 개월을 원인 모를 후유증에 시달리고, 단기간에 살이 15kg 이상이 빠졌지만, 지금은 많이 완쾌된 상황이다. 하지만, 당시의 중국에서의 병원 실태와 아프면 갈 곳 없는 이곳에서는 조금만 아프면 겁이 덜컥 난다거나, 재채기가 조금 나와도 중증 걸린 환자처럼 뜨거운 물 자주 마시기를 시작으로, 식염수로 코를 세척하고, 온갖 감기 사탕과 보조 치료를 하는 등의 유별난 건강 걱정이 몸에 베이기 시작했다.
현재도 중국은 마이코 플라즈마 폐렴, 독감, 코로나 등의 전염병이 다른 나라와 마찬가지로 돌고 있다. 내가 걸리지 않고, 주변이 걸리지 않으면 심각성을 모르듯이, 아직까지 우리 가족은 건강한 상태라서 그 심각성을 체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주변에 하나 둘 아이가 아프다거나, 열이 나거나, 독감에 걸려서 온 가족이 다 걸려서 사경을 헤맸다는 소식을 듣고, 그럴 때마다, "아프면 어디 가세요? 어떤 약 먹어야 해요?" 이게 따라오는 질문이 되어 버렸다. 그걸 공유하며, 혹시 모를 감염에 대비를 하고 있다. 포스트 코로나, 현재는 예전보다 많이 완화되고 자유를 찾았지만, 여전히 병이 걸리면 제대로 된 진단과 치료를 받지 못할 걸 알기에 오늘도 우리는 마스크를 쓴다.
중국에서 아프면 정말 갈 곳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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