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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ollie 몰리 Dec 29. 2023

말 안 듣는 주재원 와이프가 되었다.

나는 내향형입니다.

주재원 와이프라고 하면 흔히들 상상하는 모습들이 있다. 회사에서 지원되는 각종 혜택을 받으며 현지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산다고 말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회사마다 정해진 규정에 따른 집, 자동차, 교육비, 의료비 등의 지원받으니 한국에서 일반 직장생활을 하던 입장에서는 입이 떡 벌어지는 삶이기도 하다. 하지만 각자의 가정에 따라서 다른 모습을 지닌다.


나라에 따라서 다르지만, 골프와 테니스 등 운동을 즐기며, 집에는 가정부를 두어 남의 손으로 살림 도움을 받으니 손에 물을 좀 덜 묻히고, 아이는 국제학교에서 럭셔리한 교육을 받으며, 자신을 관리하고 치장할 수 있는 시간적인 부분이 많은 장점도 있다. 엄마와 아이가 현지 언어 또는 영어를 조기 유학처럼 배울 수 있다는 교육적인 장점도 있다. 또 해외생활을 하니, 일상이 여행이 되는 점도 한몫한다.


중국도 아이(Ayi, 阿姨)라고 해서 집안일을 도와주는 아주머니를 동네에 따라 다르지만 아주 저렴한 가격인 시간당 30-50 rmb(한화로 약 5,500원-9,300원)로 구할 수가 있다. 실제로 두 부부가 일을 하는 경우에는 아이의 픽업, 식사 준비, 숙제, 놀이를 다 봐주는 아이를 쓰는 경우도 있고, 입주 아이를 두는 경우도 있다.


또, 나는 해보지 않아서 모르지만, 손톱 발톱 관리나 마사지 등이 아주 저렴한 편이어서 정액권을 끊어서 많이 한다고 들었다. 골프 역시 마찬가지로 한국보다는 저렴해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많이들 즐긴다고 한다. 중국은 아시아권이라서 한인마트, 한인마트 배달 위주의 마트, 한인반찬업체, 한식당도 꽤 있는 편이고, 배달 천국이어서 배달 음식과 마트 배송 등의 편리성도 빼놓을 수 없다. 밥 하기 싫으면 사 먹어도 될 정도이다.


하지만, 애로사항도 분명히 있다. 갑갑한 서열 문화와 단체 문화가 있다. 회사의 직급에 따라서 주재원 와이프도 서열이 생기는, 신기하게 한국에서는 절대 볼 일도 없던 누구 부장님, 또는 누구 실장님 그 이하 직급의 와이프들의 사적인 모임. 남편의 직급 타이틀에 따라 주재원 와이프들 사이에서도 질서가 잡히는 신종 문화. 또 동네 및 학교 한국 엄마들 모임에서도 나이에 따라서 서열이 정해지고, 나이가 많은 사람한테는 무조건 "언니"라는 호칭과 존댓말을 쓰고, 언제부터 정착했는지에 따라서 은근한 텃새와 신경전이 생기기도 한다.


해외에 사는 이방인의 입장과 더불어, 유난히 모여 살기 좋아하는 한국 사람들 특성상 외지에 나오면 좁은 한국 사회에서 말이 많기도 하다. 그들과 한 뜻을 같이 하지 않으면, 간혹 타깃이 되거나 이상한 사람으로 비치기도 한다.



나는 아이가 어릴 적부터 친정의 도움 없이 여러 지역을 떠돌면서 독립적으로 살아서 그런지, 중국 초기 시절에 이러한 기존의 고리타분한 문제점들로 인해서 상당히 힘든 시절을 보냈다. 한국에서도 이미 아이의 어린 시절의 친구 엄마들 모임의 두께가 얄팍함을 겪었던 터라, 엄마들 모임도 관심 없어진 지 오래였다.


남편의 주재원 발령에 따라 중국에 오게 되었고, 아이의 엄마이기 때문에 수많은 영어 이메일과 학교 방문 등으로 아이의 국제학교 스케줄을 챙겨야 했고, 바쁜 남편을 대신해서 집에 관한 모든 연락과 A/S는 내가 도맡아야 했고, 중국어 소통 불가로 물건을 하나 사기 위해서도 번역기를 통해야 해서 쇼핑 시간은 몇 배로 걸리고, 파파고 번역기의 스크린숏은 날로 늘어갔다. 날 잡아서 그거 지우는 게 일이었다.


중국어로 전화가 오면 늘 벙어리처럼 '팅부동(못 알아들어요.)'를 외치며 답답해해야 했다. 또, 출장 많은 남편으로 인한 해외살이 독박육아는 한국에서 자신만만했던 나를 더 내려놓기 시작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래도, 배워가는 재미와 도전에서 오는 희열이 있어서인지, 나의 주거지와 아이의 학교와 남편의 직장만 바뀌었지, 내 생활은 한국에서와 같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고 나만의 착각이었다.


나의 주관대로 행동하면, 그게 남다르게 비치다 보니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비쳤을 수도 있다. 내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은 이상, 옮고 그르다는 정답은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고, 나는 기본적으로 내향형인 사람이라 에너지를 아껴야 하루를 살아갈 수 있었다. 그냥 서로 다른 다양성을 인정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늘 품고 살았던 것 같다.


물론, 여러 일을 겪으면서 나는 자유를 찾아 또 떠나왔고, 그러면서 코로나가 터지며 건강상의 위기도 겪었고, 그로 인해 나의 중국 주재원 와이프로서의 삶은 다른 주재원 와이프들의 인생과 좀 다른 삶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것 같다. 쉽게 가면 될 길을 나는 나 스스로 하겠다고 팔 걷어붙이고 사는 편이었고, 누구의 도움을 받아서 편하게 가면 될 길을, 내가 개척한다고 앞장서는 편이었다. 또 마음에서 동하지 않으면 하지 않는 유별난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더 성장했고, 이제는 결정되지 않은 일에 있어서 더 이상 불안해하거나, 걱정하지 않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중국 생활을 통해서 배웠고, 스스로 사는 법도 더 터득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지금 이렇게 안정된 삶을 살다가 또 회사의 부름을 받아서 중국을 떠날 날이 얼마 안 남았지만, 나의 초기 기억들을 되살려서 일반적인 주재원 와이프의 삶, 그리고 말 안 듣는 청개구리 주재원 와이프의 삶을 하나씩 꺼내보려고 한다.

https://brunch.co.kr/@wanderwoman/59

사진 출처 : Unsplash의 Chris Mur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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