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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취준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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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몰린 Nov 07. 2021

필요한 건 저장이 아니라 발행이다

실패하지 않으려고 하면 어떤 피드백도 받지 못한다

대학교 3학년 여름. 운이 좋게 처음 쓴 자소서가 합격하고 면접까지 합격해서 중견기업에서 인턴으로 지냈다. 그래서 취업 불황이라고 해도 취업이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일하는 건 학교에서 뭔가를 배우는 것보다 훨씬 재밌고 유익했고, 그래서 나는 빨리 일하고 싶었다. 


인턴 계약이 끝났다. 마침 친구 한 명이 졸업을 앞두고 취업을 준비했기에 나는 친구와 카페에서 자소서를 쓰면서 희망찬 미래를 그렸다. '늦어도 1년이면 괜찮은 데서 일하고 있지 않겠어' 하는 안일한 생각은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산산 조각났다. 대기업 서류는 모조리 떨어졌다. 초조해졌다. 학교 수업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카페에서 종일 자소서를 써댔다. 그렇게 수개월이 지났지만 딱 한 곳 빼고는 모조리 떨어졌다. 그 한 곳마저도 면접에서 떨어졌다. 그때 깨달았다. 나는 지금 무척 형편없다는 것을.


소위 자존감이라는 것이 바닥을 찍었다. 놀고 있진 않았고 매일매일 키보드를 두드리며 자소서를 썼었다. 그러나 5시간 동안 300자를 쓰고 이내 지워버렸다. 비로소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자소서에 목을 맸지만, 그저 조급할 뿐이었기에 제대로 된 방향성을 찾지 못했다. 연이은 실패 끝에 성취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글 쓰는 것은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한 번 브런치 작가에 도전해보리라 결심했다. 당시에 앞으로 연재할 글을 제출해야 했고, 취준생인 나는 호기롭게 취준생의 고충과 생각을 써보겠다며 제출했다. 운이 좋아서 합격했다. 그러나 이후 1년 반 동안 취준생의 이야기는 결코 발행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부끄러웠다. 내가 쓴 글은 너무 형편없었다. 어떻게 쓰든 학교 교양 수업에 내는 리포트 마냥 어설프게 쓴 문장과 나름 똑똑해보려고 쓴 어휘들이 눈에 밟혔다. 별생각 없이 읽었던 다른 브런치 작가의 글을 참고했고, 그렇게 써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새삼 가독성과 재밌는 텔링의 중요성을 느꼈다. 그 와중에 서류는 계속 낙방했고, 어쩌다 일을 하게 되니 피곤하다는 이유로 글을 쓰지 않았다. 그럼에도 자소서는 계속 꾸역꾸역 썼다. 하지만 점점 퀄리티는 낮아졌다. 형식은 더 깔끔해졌지만, 어쩐지 글의 매력은 떨어졌다.


자소서를 쓰기 너무 괴로울 때면 하소연하듯 브런치나 구글 문서에 글을 쏟아냈지만, 글들은 결코 발행되지 않았다. 언제까지고 초고 상태에서 저장만 될 뿐이었다. 이게 너무나 큰 실수임을 깨달은 건 스타트업 기업에서 일을 하면서였다. 당시 시나리오를 써야 했던 나는 주어진 시간 내에 사수도 없이 부딪히며 CEO와 개발자가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내야 했다. 뭣도 모르니 일단 써야 했고, 그다음에 보여주면서 조금씩 수정해나가야 했다. 처음 보여주는 건 너무나 부끄러웠으나, 그것만큼 좋은 약이 없었다. 이후에는 오히려 내가 먼저 다가가서 제발 고쳐야 할 점이 없는지 봐달라고 했다. 어렵겠다 싶었지만 결과물은 기간 내에 완성됐다. 아주 오랜만에 느껴본, 작지만 거대한 성취감이었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취준생이다. 일한다고, 취업 준비해보겠다고 휴학하느라 아직 졸업도 하지 못했다. 스타트업에서의 교훈은 그새 까먹었는지 나는 내 손에 쥔 보잘것없는 것을 보여주지 않겠다며 억지를 부렸다. 그러나 그래서는 결코 아무런 배움도 없고, 더 나아질 것 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이렇게 글을 쓴다. 형편없는 결과물을 내놓는 것을 실패라고 여기고 저장한다면 언제까지고 글을 저장만 해 둘 것을 알기에 발행을 목표로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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