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이런 건 처음이야, 정든 날들이여 안녕!
하늘에서 함박눈이 흩날리듯 내리기 시작했다.
여직원들이 강원도 스키장으로 1박 2일 여행을 떠나는 날이다.
모두 아침 일찍 은행으로 나왔다.
관광버스는 일찍부터 대기 중이었다.
희경은 처음 가는 여행에 설레었다.
여행을 갈 생각에 마음은 이미 붕 떠서 하늘에 걸려있다.
차례로 버스에 올라탔다.
희경은 창가 쪽으로 앉았다.
다들 기분이 좋은지 싱글벙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버스는 점점 도심을 지나 고속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눈은 점점 더 내리기 시작하더니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바람에 날리며 송이송이 꽃송이가 되어
나뭇가지 위에도 들판에도 수북이 쌓여갔다.
멀리 보이는 산은 눈으로 덮여 새하얗다.
아름다운 풍경을 미처 다 감상하기도 전에 꽃송이 같았던 눈은 어느새 폭설로 변했다.
대관령을 넘어 가려다 도로에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도저히 더 갈 수가 없어서 오대산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모두 당황하였다.
버스는 천천히 조심조심 달렸다.
오대산 가는 길은 가로수가 아치형으로 되어 있어 눈꽃으로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모두 아름다운 설경에 걱정도 잠시 잊었다.
버스는 절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암자가 있었다.
일행은 모두 버스에서 내려 사진도 찍고 눈밭에 뒹굴며 해맑게 웃었다.
눈은 무릎까지 덮였다.
그렇게 뒹굴며 노는 동안 퍼붓듯 내리던 눈이 멈췄다.
햇빛도 쨍하게 내리쬐었다.
반짝이는 설경에 감탄사를 연거푸 쏟아냈다.
버스는 시골길을 달려갔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스키장에 도착했을 때, 벌써 많은 사람들이 스키를 타며 북적거렸다.
희경은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는 사람, 내려오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처음 보는 광경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키장도 처음이고 스키 타는 것도 처음이었다.
모든 것이 새로웠다.
아기가 처음 걸음마 배우듯 희경도 한 걸음 한 걸음 옆으로 걸어 올라가고 내려오는 연습을 하였다.
타고 서는 연습을 한 후에야 겨우 밑에서 스키를 탈 수 있었다.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스케이트는 제대로 일어서는 것조차도 못한 채 배우는 걸 포기했었다.
그거에 비하면 훨씬 쉽게 느껴졌다.
물론 고난도 스킬은 엄두도 못 냈지만 몇 시간 즐기기엔 충분하였다.
사람들이 멋있는 포즈로 스키를 타고 내려오는 광경에 부러움이 한가득 밀려왔다.
정신없이 스키를 타다 보니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 되었다.
희경은 언니들과 함께 밥 짓기를 시작했다.
밥물을 부어야 하는데 물이 없어 하얀 눈을 손으로 퍼서 코펠에 넣었다.
'설마 될까?'싶었다.
그런데 예상을 깨고 밥이 너무나 맛있게 잘됐다.
놀람 속에 모두들 배가 고팠는지 추위도 잊은 채 허겁지겁 맛있게 먹었다.
까르르~~~ 까르르~~~
하하 호호
웃음소리가 방안 가득 울려 퍼졌다.
카세트테이프를 틀어 놓고 신나게 놀다가 조명이 너무 밝아 분위기가 별로라며 언니 한 분이
머플러로 전등을 감쌌다.
약간 어두운 분위기를 연출했다.
한결 아늑한 분위기가 되었다.
모두 한마음으로 음악에 심취되어 몸을 흔들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희경은 이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한 번도 춤을 춰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하였다.
주위 눈치를 살폈다.
힐끔힐끔 다른 직원들이 추는 것을 보며 서서히 몸을 흔들었다.
엉거주춤, 쭈뼜쭈뼜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춤을 추다 멈추기를 반복하며 분위기를 맞추려고 애를 썼다.
분위기가 고조되어 밤이 늦도록 깔깔깔, 하하하, 호호호 웃음소리가 조용한 숙소 복도에 가득 울려 퍼졌다.
전에 살던 집을 팔고 세를 끼고 일부 대출을 받아서 인근 마을에 집을 사서 이사를 했다.
환경은 훨씬 좋아졌다.
그렇지만 대출금을 갚아 나가야 하는 부담감은 있었다.
대출이자는 희경이 갚기로 하였다.
따로 사시던 할머니도 함께 살기로 하셨다.
새로 이사 온 집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기쁘고 신이 났다.
할머니께서는 풍채가 좋으셨다.
어릴 적 시골에서 뵙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말수가 적으신 할머니를 볼 때마다 얼굴에서 근엄한 표정을 읽을 수가 있었다.
눈이 부리부리 하신 데다 부처님 귀처럼 축 늘어진 커다란 두 귀, 통통하고 갸름한 얼굴에 비녀를
꽂아 쪽진 머리를 하셨다.
항상 식사할 때면 할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겸상을 하시고 다른 식구들은 따로 상을 봐서 먹어야 했다.
주변 사람들은 할머니를 "호랑이 할머니"라 불렀다.
동생들은 할머니를 무서워했지만 희경은 할머니를 좋아하고 무서워하지 않았다.
할머니께는 언제나 오빠 영호가 일 순위였다.
희경은 고객들 공과금 고지서를 보고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주판으로 느릿느릿 더듬거리며 게산을
하고 나서 돈을 받고 영수증을 내주었다.
학교 다닐 때 주산을 배웠지만 여전히 서툴렀다.
담당 업무가 공과금 수납으로 바뀌면서 더 힘들었다.
누구나 한 번씩 거쳐가는 업무였다.
비록 느리긴 해도 계산이 틀리거나 하지는 않았다.
공과금 마감날이 되면 직원들이 도와주느라 모두가 바빴다.
혼자 감당하기에 버겁기도 하고 공과금이 마감되어야 다른 업무도 마감을 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일요일이지만 당직이라 은행에 나왔다.
처음 근무하는 거라 어색하였다.
같이 당직을 하는 여직원이 있기도 하고 밤에 숙직을 해야 하는 남자 직원들도 있어서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잠심 때가 되었다.
희경은 구내식당에서 밥을 하고 간단히 된장찌개를 하였다.
직원들은 맛있다며 밥이며 찌개를 남기지 않고 싹싹 다 먹었다.
음식 솜씨가 좋다며 다들 야단이었다.
희경은 날이 가면 갈수록 직원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직원들과 유대 관계도 돈독해지고 잘 어울렸다.
특히 동생들은 희경을 더 좋아하고 잘 따랐다.
매일 퇴근도 같이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녔다.
가끔은 DJ가 있는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시면서 노래를 듣기도 했다.
아침에 출근을 하면 지점 바로 옆에 있는 다방에서 계란 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를 마시기도 하였다.
정든 교정을 떠나는 마지막 날!
졸업식 하는 날이다.
할머니께서도 함께 오셨다.
꼭 한 번 와 보고 싶다고 하셨었다.
바람이 불어서 제법 쌀쌀했다.
졸업식을 하는 동안 눈과 뇌리에 담겨 있던 추억들이 영화의 한 장면처럼 한 컷 한 컷 스쳐 지나갔다.
눈이 펑펑 내리던 날, 담임 선생님과 친구들이 눈싸움을 하며 사진을 찍었던 그날.
노천극장에 앉아서 매주 예배를 보았던 그날들.
학교 기념관에서 연극을 봤던 그날들.
개교기념일에 축제를 하고 달빛, 별빛 비추는 밤에 촛불 행진을 했던 그날들.
봄과 여름에는 꽃이 피고 꽃향기가 그윽해 코끝을 간지럽혔던 순간들.
라알락 꽃, 장미꽃, 아카시아 꽃, 실비아 꽃 향기는 특히 잊을 수가 없다.
노랗게 물든 커다란 은행나무 아래 벤치에 앉아서 책을 읽었던 그 순간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테니스를 쳤던 그날들.
이제는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지겠지.
희경의 꿈을 몽글몽글 피워왔던 곳!
아름답고 정든 교정을 떠나는 날!
희경은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가슴속 깊이 한 장 한 장 끼워 넣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정든 날들이여 안녕!
오빠 영호는 군 복무를 마치고 제대를 하였다.
새로 이사 온 집이 낯설었다.
전에 살던 집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좋은 집을 보고는 매우 흡족해했다.
자신의 방도 생겼다는 것이 무엇 보다도 좋았다.
지방 대학교를 합격하고도 생활 형편 때문에 포기를 했었다.
다시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꿈틀거렸다.
그래서 방송 통신대학교 경영학과를 지원했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 중도 포기했다.
당장 돈을 벌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공부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음 한편이 허전했지만 일단 먼저 직장 생활에 충실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