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 속에서 피어난 꽃 (제35 화)

(소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by 황윤주

제35 화


희경은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시게 아름다워 누워있다가 몸을 일으켰다.

일요일이라 원희와 영화를 보기로 해서 조금 일찍 일어났다.

서둘러 어머니와 함께 식구들 아침 식사를 준비하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할머니와 아버지가 드실 상과 어머니와 아이들이 먹을 상을 따로 차렸다.

할머니와 아버지는 게장을 워낙 좋아하셔서 항상 빠드리지 않고 놓는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생선도 거의 매일 놓는데 오늘은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만든다는 '전어'를 바삭하게 튀겨놓았다.

할머니께서 오신 이후로 밥을 먹을 땐 언제나 말없이 조용히 먹는다.

할머니는 평소 말씀을 많이 하시는 편이 아니라 가족들은 늘 조심조심 말을 한다.

주변에서 할머니를 호랑이 할머니라 부를 만큼 눈이 부리부리하고 무섭다.

식사를 마치고 희경은 약속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후다닥 설거지를 마치고 콧노래를 부르며 외출

준비를 하였다.

날씨도 몹시 화창하여 기분도 덩달아 좋았다.

버스정류장으로 걸어가는 발걸음도 가벼웠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영화를 볼 생각에 신이 났다.

한 번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본 적이 없기에 더 설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떠날 줄 몰랐다.

희경은 영등포시장역에서 내렸다.

지하도를 건너가 약속한 장소로 향했다.

상가 2층에 위치한 다방은 자주 갔던 곳이었다.

다방 안에 들어서자 희경은 두리번거리며 혹시나 원희가 먼저 와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런데 희경과 눈이 마주친 원희의 맞은편에 웬 아가씨가 앉아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희경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웃으며 대화를 하고 있던 원희도 희경을 보자 당황스러워했다.

희경은 잠시 주춤거렸다.

인사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던 차에 그 아가씨가 일어나더니 자리를 떴다.

그 여자는 작은 키에 얼굴이 동그랗고 예뻤다.

귀여운 외모였다.

희경은 누군지 물어보았다.

원희는 이모가 소개해 주었던 아가씨라 했다.

열 번 정도 만났고 이름은 이 미현이라고 했다.

아직 정리는 안 한 듯 보였다.

그동안 더블데이트를 한 것 같았다.

기분이 나빴다.

믿는 도끼에 야무지게 발등을 찍힌 기분이 들었다.

만나서 차 마시는 정도였고 이제 만나는 일 없을 거라며 변명을 하였다.

희경은 기분이 언짢았다.

순간 웃음기가 사라지고 얼굴 표정이 굳어졌다.

원희는 희경의 표정을 살피더니 바로 사과를 했다.

"미안해. 생각이 짧았어. 그렇지만 사귀거나 좋아하는 사이는 아니야. 오늘 이후엔 만나는 일 없을 거야.

약속해 기분 풀어."

희경은 말을 듣고 기분은 나빴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마음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뭔가 찜 찜 한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원희는 기분을 풀어주려고 애를 썼지만 희경은 웃을 기분이 아니었다.

희경은 커피를 마시면서 노래를 들었다.

노래 가사를 천천히 생각하면서 듣다 보니 마음의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고는 마주쳤던 그 여자의 얼굴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자신을 다독였다.

'별일 아니야. 그럴 수 있지. 잊자... 잊어버리자.'라며 자신도 모르게 속으로 다짐을 하면서 되뇌고 있었다.

원희는 그런 희경의 눈치를 살폈다.

또 한편으로는 언제쯤 영화를 보러 가야 하는지 타이밍을 재고 있었다.

어떻게든 기분을 풀어주고 싶었다.

마주 앉아 있던 원희는 희경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그러고는 살며시 희경의 손을 잡더니 다시 한번 사과를 하였다.

"미안해. 앞으로 다시는 만날 일 없을 거야. 약속할게."

"알았어"

희경은 짧게 대답을 하였다.

원희의 따스한 온기가 느껴지면서 자신도 모르게 스르르 마음이 풀렸다.

이제까지 한 번도 잡지 않았던 손을 처음 잡아 본 것이다.

희경은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음이 묘한 설렘으로 다가왔다.

원희의 거듭되는 사과에 서운했던 마음이 눈녹 듯 사라졌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꽤 흘렀다.

배도 출출했다.

일단 나가서 밥부터 먹자고 하였다.

밖은 햇살이 가득했다.

극장 옆에 있는 분식집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시원한 물부터 마셨다.

김밥 한 줄과 비빔냉면 두 개를 주문했다.

냉면은 새콤달콤하면서 적당히 매웠다.

맛있는 걸 먹어서 그런지 기분도 한결 좋아졌다.


영화관 매표소에 표를 사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희경과 원희는 <취권>을 보기 위해 표를 두 장 샀다.

원희는 무술 영화를 좋아한다고 하였다.

희경은 자신이 어떤 장르를 좋아하는지 잘 몰랐다.

영화관에서 보는 것은 난생처음이라 더욱 그러했다.

영화를 보는 내내 푹 빠져서 완전 몰입이 되었다.

권법이라는 것도 처음 알았다.

술에 취한 듯 쓰러질 듯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권법을 쓰는 것이 신기하였다.

중간중간 웃음도 나왔다.

가끔 아슬아슬하기도 했다.

푹 빠져서 영화를 보고 나니 모든 잡념이 사라졌다.

원희는 가끔 영화를 보로 다니자고 하였다.

희경도 좋다고 하였다.


밖으로 나오자 깜깜한 밤이 되어 있었다.

원희는 바로 헤어지기가 싫었다.

아쉬움이 많이 남아 영등포 밤거리를 걸어보자고 하였다.

거리는 반짝거리는 네온사인 불빛과 상가 불빛들이 비쳐 환했다.

오고 가는 사람들로 거리는 북적거렸다.

여기저기서 노래도 들려왔다.

원희는 아무 말하지 않고 살며시 희경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희경에게 바짝 붙어 걸었다.

희경은 가슴이 뭉클하고 두근거렸다.

원희에게 소원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아들어 갔다.

잠시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힌 것 같아 찜찜했던 마음이 사라지고 덤덤해졌다.

밤이 깊어 어두워진 거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더 이상 지체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발걸음을 재촉하였다.

밤하늘엔 별들이 반짝거리며 빛을 내고 있었다.

희경은 하늘을 올려다보고 북두칠성을 찾아보았다.

국자 모양의 별자리가 보였다.

까만 도화지 위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원희는 군대를 가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마음이 초조하였다.

아직 입영통지서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하루하루 긴장되고 걱정이 되었다.

전문대라 일단 졸업을 하고 나머지 과정은 군대 갔다 와서 편입할 생각이다.

그래서 군입대 전에 희경과의 만남을 확실하게 해두고 싶었다.

더 정확히 말해서 약혼이라도 해놓고 가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집에 얼른 데리고 가서 허락을 받자. 언제가 좋을까?'

곰곰이 생각하였다.

'아버지 생신 날 데리고 가자. 집안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

원희는 어떻게든 허락을 받으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다.

왠지 희경을 놓치면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자꾸자꾸 뇌리에 맴돌았다.

그럴수록 환하게 웃는 희경의 얼굴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모두 잠든 고요한 밤이다.

원희는 희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밤은 깊었지만 희경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소곤소곤 속삭이듯 애틋한 마음을 담아 말을 했다.

"사랑해~~~!"

희경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두근두근 설레었다.

가슴이 쿵쾅거렸다.

처음 듣는 고백에 따스한 전율이 온몸에 전해졌다.

"나도 사랑해"

수줍게 말을 했다.

순간 부끄러웠다.

얼굴도 화끈 달아올랐다.

원희는 계속해서 달콤한 말을 이어갔다.

"너랑 꼭 결혼하고 싶어. 내겐 너뿐이야."

희경은 잠시 심장이 멎는 듯했다.

한꺼번에 너무 많은 얘기를 듣다 보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희경은 뭐에 홀린듯하였다.

원희는 가까운 곳으로 1박 2일 여행을 가자고 하였다.

단둘이 가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다른 사람들도 같이 가자고 하였다.

희경도 좋다고 하였다.

밤이 깊어 어느새 시곗바늘이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계속되는 얘기 소리에 주무시던 원희 어머니가 잠에서 깼다.

"잠도 안 자고 늦은 시간에 뭐 하는 거냐! 얼른 자라."

호통치는 소리가 들렸다.

원희는 손바닥으로 얼른 전화 수화기를 막았다.

"알겠어요. 죄송해요."

원희는 흠칫 놀랐다.

희경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아쉬움은 많이 남았지만 이따 저녁에 만나자고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희경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잠이 오질 않아 멀뚱멀뚱 천장을 바라보았다.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달빛이 방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가물거리듯 눈꺼풀이 스르르 내려오고 있었다.




*다음 화에 게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