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의 모유 수유를 끝내는 날, 그걸 기념하겠다며 남편과 맥주를 마셨다. 남편의 맥주 캔에 내 맥주 캔을 부딪치며 입으로 짠-하고 외쳤다. 안주라곤 식탁 위에 놓인 먹다 남은 반찬뿐이었지만, 기분만큼은 꼭 생일날 같았다. 맥주 한 캔에 괜히 들떠 달력에 모유 수유 종료일이라고 남겨둬야 하는 거 아니냐며 실없는 소리를 해댔다. 거의 2년 만에 마시는 맥주는 참 달았다. 잘 마시지도 못하면서 목구멍으로 끝도 없이 맥주를 넘겼다. 맥주 캔을 내려놓으며 물속에서 오래 웅크리고 있던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하. 살 것 같다.”
정말로 오랜 시간 물속에 잠겨 있던 사람처럼 말했다. 이제 겨우 숨통이 트인다는 듯이. 다시 한번 길게 한숨을 내뱉자 앞에 앉은 남편이 수고 많았다고 말해 주었다. 수고를 이야기하기엔 아이는 이제 겨우 10개월째에 접어들고 있었다. 얼마나 더 오랜 숨을 참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맞아. 나 진짜 수고 많았지.”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 캔을 흔들자 남은 맥주가 무겁게 찰랑거렸다. 앞으로 수고해야 할 날들을 위해 다시 짠-하고 캔을 부딪쳤다. 맥주 캔을 든 오른 손목에 파스를 떼고 난 자국이 지저분하게 남아있었다. 그 파스 자국을 바라보며 지나간 10개월의 시간과 앞으로 무수히 남은 육아의 시간을 보듬어 보았다.
아이를 낳기 전까지 엄마라는 단어는 내겐 담장 너머의 언어였다. 가끔 벽에 귀를 대고 귀 기울여야 희미하게나마 들을 수 있는 저 세상의 언어. 다른 사람들은 그토록 흔히, 자주, 가까이 쓰는 엄마라는 단어를 나는 깜짝 놀랄 때도 외쳐 본 적이 없었다. 엄마와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하며 살아온 내 삶에 친정엄마가 없어 마음에 냉기가 도는 순간들은 더 많이 생겨났다. 엄마의 부재와 친정엄마의 부재는 또 이렇게 다르구나. 아이를 안고 먹이고 재우는 동안 많이 생각했다.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낮잠을 푹 자고 일어나 보니 거실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고 식탁 위엔 자기가 좋아하는 반찬들이 가득했다던 친구의 말을 떠올리며, 그런 마법 같은 일은 평생 일어날 일이 없는 나는 바닥에 뒹구는 아이의 내복을 바라보며 한숨 쉬었다. 임신 때 입덧으로 고생하는 친구가 다른 건 못 먹어도 엄마가 해준 콩국수는 먹을 수 있었다며 웃었을 때도‘엄마 밥’ 같은 건 아예 기억도 없던 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함께 웃기만 했다.
어디 몸이 아파도 잠깐 아이를 맡아 줄 사람이 없어 남편이 쉬는 토요일만 기다리던 어느 날, 잠깐 친정엄마에게 아이를 맡기고 자유시간을 갖는다는 친구의 인스타그램 피드를 보면서도 작게 한숨을 쉬었다. 시댁과 친정이 멀어 나와 같은 사정의 사람들이 많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 사정 축엔 끼지도 못하는 신세 같았다. 엄마도 엄마가 필요하다는 말이 절로 이해가 되었다. 이 세상에 친정엄마 없는 사람은 나뿐인 것 같아, 마음이 바닥을 찍었다. 나의 육아는 왜 이리도 한숨이 많이 나올까.
나를 대신해줄 사람, 내 아이에게 잠깐이라도 나의 역할을 대신해줄 다른 이름의 엄마. 나만큼이나, 어쩌면 그보다 더 내 아이를 사랑해줄 친정엄마. 친정엄마라는 단어는 떠올리기만 해도 왜 그렇게 마음이 저릴까. 경험해 보지 못한 나도 때로 눈물 날 것 같은데, 있는 사람들은 오죽할까 싶었다. 엄마와 통화하며 툴툴거리는 친구를 보고 엄마한테 잘해-라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관뒀다.
그럼에도 엄마와 가장 먼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던 나에게 아이는 엄마라는 단어를 가장 처음 내뱉었다. 나의 수고를 다 안다는 듯이. 잠 못 들던 외로운 섬에서 자신의 귓가에 노래를 불러준 이가 나라는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비록 불러보진 못했으나 앞으로 아이가 내뱉는 엄마라는 단어를 평생 들으며 살아가겠지. 내 안에 쌓인 담장은 그렇게 와르르 무너졌다.
맥주를 마신 그날 새벽에도 잠투정에 깬 아이를 안고 거실을 배회했다. 아무리 많은 걸음을 걸어도 아침은 쉽게 오지 않았다. ‘음마.. 음.. 마..’ 아이가 졸린 눈을 내 어깨에 비벼대며 웅얼거렸다. 응. 아가, 엄마야. 엄마. 고요한 거실 속에 우리 둘의 언어가 스며들었다. 창밖은 조금씩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세상에 없던 단어가 새벽의 기운처럼 조금씩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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