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종이 한 장

by 여름

매년 3월의 교실은 그때만 누릴 수 있는 특유한 분위기로 고조되어 있었다. 어색한 인사를 나누는 친구들의 표정엔 묘한 설렘과 약간의 긴장감이 교차했다. 나는 누구와 단짝이 될까. 애는 어떤 성격의 아이일까. 혹시라도 단짝을 못 만들어서 점심을 혼자 먹으면 어쩌지, 하는 소소한 걱정들과 호기심 가득한 눈빛이 차가우면서도 따뜻한 3월의 공기 속에 흘러넘쳤다. 그런 아이들 틈에 나의 고민 1순위는 선생님이 나눠주는 가정환경조사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일이었다. 다들 친구의 표정에 집중하며 말 없는 눈치 게임을 시작할 때, 나는 앞으로 가정환경조사서를 어떻게 남들 눈을 피해 선생님께 전달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나눠주는 가정환경조사서가 앞줄 아이들의 손을 타고 파도처럼 넘어와 내 손에 다다르면 나는 바다에 빠진 사람처럼 그대로 굳어버리곤 했다. 나의 눈치 게임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앞 장에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는 보호자 및 가족란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이걸 어떻게 하면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선생님께 전달할 수 있을까. 행여 누가 내 가정환경조사서를 보면 어쩌지. 새 학기부터 엄마 아빠 없는 애로 불려서 왕따라도 당하면? 걱정은 하굣길의 내 그림자만큼이나 길어졌다. 가방 안에 얇은 종이 한 장이 무겁게 어깨를 짓눌렀다.


가정 환경조사서를 제출하는 날이 되면 나는 책상 서랍 속 종이를 꺼냈다가, 다시 넣기를 반복했다. 부모의 이름 대신 성이 다른 할머니와 고모, 고무부의 이름이 적인 가정환경조사서를 혹시라도 누가 볼까, 오전 내내 긴장하고 있었다. 선생님이 뒷줄부터 걷어 내라 하면 일부러 뒤에 앉은 아이의 종이를 위에 올려 앞사람에게 전달했다. 행여나 앞에 앉아있는 아이 중 누구 하나가 들춰볼까 싶어 마음이 조마조마했다. 어떤 선생님은 반장에게 걷어오라고 시키기도 하셨는데 그럴 땐 아이들이 내게 관심 없는 틈을 타 반장의 책상 위에 올려진 가정환경조사서 사이에 슬쩍 끼워 놓곤 했다. 종이가 내 손을 떠나 선생님께 다다를 때까지 가슴이 쿵쾅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건을 훔치는 도둑이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었지만 나는 매해 3월마다 똑같은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가정환경조사서를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제출하면 눈치 게임의 우승자처럼 마음이 자유로웠다. 그 순간부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이 온전히 3월의 교실을 마음껏 누릴 수 있었다. 남들이 보기에 사소하고 작은 이 일들이 사춘기 여학생인 나에겐 더없이 큰 고민이자 걱정이었다. 그 시절 모두에게 친구는 학교 안, 그 세계를 함께하는 존재였다. 내게 친구의 존재가 또렷해질수록 나는 내 비밀을 철저하게 숨기고 싶었다.


하지만 자유로움도 잠시 가정환경조사서를 내고 3~4일이 지나면 선생님의 호출이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호출이 당연한 나의 환경 탓에 때때로 난감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치열한 눈치 게임으로 얻은 친구들끼리 수다를 떨고 매점을 오가느라 바쁜 점심시간에 명찰을 봐야만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아이 한 명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네가 김수현이지? 담임이 오래.”


말을 전하고 그 아이 역시 제 무리로 빠르게 흡수되었다.


“담임이 널 왜 찾아?”


팔짱을 끼고 있던 친구가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보면 나는 가정환경에 대한 면담인 줄 뻔히 알면서도 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러게’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무실에 혼자 가고 싶었지만, 친구는 자기도 같이 가자며 낀 팔짱을 놓아주지 않았다. 내 팔을 단단히 잡는 친구의 손을 떼어 낼 수 없어 선생님의 호출을 무시하는 대가로 종례 시간에 선생님께 한 소리를 들어야 했다.


종례가 끝난 후 교무실로 따라오라는 선생님의 꽁무니를 쫓아 복도를 걸으며 스쳐 가는 교실 안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저 웃는 게 본인들에게 주어진 일인 것처럼 웃느라 정신없는 아이들의 머리 위로 3월 말, 봄의 절정을 코앞에 둔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졌다. 햇살 속에 먼지가 별처럼 반짝거렸다. 다정한 봄볕은 한 명 한 명 놓치지 않고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책과 책상 틈 사이사이에 온기를 내뿜었다. 그 온기에 긴장감이 풀린 아이들의 표정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교실 밖 햇살이 닿지 못하는 복도엔 약간의 냉기가 흘렀다. 부디 교무실에 학생이 아무도 없길 바라며 나는 복도 바닥에 길게 누운 선생님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걸었다. 부디 아무도 보지 않고 듣지 않기를. 늘 무언가를 기도하는 사람처럼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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