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진역 앞에 육교가 존재하던 시절. 그 육교를 수십 번 왕복하며 재수학원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아침이건 저녁이건 늘 똑같은 표정으로 육교를 걷는 사람들 틈에 나와 내 친구 J도 매일 그 육교를 건넜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지만 같은 반이 된 적은 없었던 나와 J는 방송반 활동을 함께 했었다. 동아리 특성상 수업 시간을 제외하곤 늘 방송반에 상주했던 탓에 반 친구들보다 방송반 친구들과 훨씬 친하게 지냈다. J와는 그렇게 고등학교 3년도 모자라 재수학원을 함께 다니며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독서실에서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 육교를 건너며 우린 공부를 제외한 모든 이야기를 나눴다. 공부를 뺀 나머지 세상은 너무나 웃겼다. 뭐 때문에 그렇게 웃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육교 위에서 배를 붙잡고 한참 서 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언젠가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우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육교 아래로 지나가는 차들의 바퀴 소리만 빈 공백을 채웠다.
“너 드레스 입은 모습 상상하니까 눈물 날 것 같다.”
“나도.. 괜히 찡해..”
결혼 상대도 없는 재수생의 신분이면서 당장 둘 중 한 명이 날이라도 잡은 것처럼, 우린 서운함과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한여름 밤 육교 위를 함께 걸었던 J는 그로부터 8년 뒤 내 결혼식에서 축사를 읽어주었다. 축사를 읽으며 너무 많이 운 탓에 우리 시댁에선 한동안 화제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렇게 친했던 J 역시 내 가정사를 알지 못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거기에 대학교 이후 만났던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라곤 내 남편이 될 사람뿐이었다.
결혼 준비 막바지에 나는 작은 아빠 내외의 이름이 적힌 청첩장을 바라보며 식장에 입장하는 내 모습을 자주 상상했다. 내 손을 잡고 걷게 될 작은 아빠를 보고 친구들이 나의 아빠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이름만 결혼식일 뿐이지 마치 몰래카메라 같았다. 속이는 건 난데 내가 속은 것처럼 펑펑 울고 싶었다. 남들은 걱정하지도 않을 청첩장에 적히는 이름과 버진로드를 함께 걷게 될 누군가에 머리 굴리며, 정작 결정해야 할 것들은 결정하지 못한 채 나는 서서히 지쳐갔다. 청첩장에 적인 이름을 보며 부모의 부재가 정말 남에게 흉이 되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서른이 다 되어가던 나는,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점이 흉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오히려 작은 아빠 내외를 어떻게 하면 더 나이 들어 보이게 할지 생각하는 게 더 부끄러운 일이란 것도.
그 청첩장을 J에게 건네던 날이 생각난다. 청첩장을 건네며 난 별말이 없었고 청첩장을 받는 J는 연신 축하한다고 말했다. J는 한참 청첩장 안에 쓴 편지를 읽어 나갔다. 웨딩홀의 이름과 약도, 시간 같은 걸 보고 마지막 부모님 성함이 적혀있는 곳에 J의 눈이 멈췄을 때 나는 조금 긴장했다. 괜히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다른 곳에 시선을 두며 말을 돌렸다. 긴장했던 것이 민망하게 J는 아무런 말 없이 흰 봉투에 청첩장을 조심스레 집어넣었다. 이미 접착력이 떨어진 스티커를 몇 번이고 꾹꾹 눌러댔다.
그 몰래카메라가 성공적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식이 끝나고 가족사진을 찍을 때 대기하고 있던 친구들의 표정을 유심히 살폈다. 누군가 귓속말하는 걸 보고 혹시 부모님에 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본식 사진을 찍는 그 순간에도 카메라에 담길 내 표정보다 친구들의 표정에 더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사진 속에 나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린 채 지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무 많이 운 탓에 오른쪽 속눈썹은 떨어지고 없었다.
가끔은 생각해본다. J에게 만이라도 먼저 이야기했었으면 어땠을까. 우리가 수없이 걸었던 육교 위에서 지나가는 차들의 경적과 사람들의 발소리에 기대어 내 비밀을 슬쩍 흘려봤더라면. 늘 배를 잡고 웃던 날처럼 웃을 순 없었겠지만 적어도 8년 후에 누구 한 명에겐 내 마음과 상황을 시원히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텐데. J 뿐만 아니라 내가 아는 모두가 나에게서 멀어지지 않을 거란 걸 확신하면서도 나는 내 마음을 여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마음의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언젠가 내가 ‘지금까지 몰래카메라였습니다!’라고 외치는 날, 나와 J가 육교 위에서 배를 붙잡고 웃었던 것처럼 모두가 한바탕 웃고 지나쳤으면 좋겠다. 결혼식 날처럼 속눈썹이 떨어져 나갈 정도로 울었던 날들이 내겐 너무 많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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