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일이 힘드신가요?”
상담실은 드라마 세트장을 꾸며 놓은 것 같았다. 가지런히 꽂혀있는 책들과 윤이 나는 갈색 책상, 그 위에 내가 작성한 상담지를 바라보며 의사 선생님이 물었다. 부드럽고 나지막한 말투에도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한 채, 선생님 뒤편의 책장 속 책들만 바라보았다. 나는 마음이 아픈 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난생처음 의자에 앉아본 사람처럼 의자 끝에 어설프게 걸터앉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뭐라고 말이라도 꺼내려 입을 달싹거렸을 때, 눈물이 먼저 터져 나왔다. 나는 앞에 놓인 티슈를 원래 내 것인 양 툭툭 뽑아 눈물을 닦았다.
산후우울증 같은 건 그저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다. 첫 아이를 낳고 육아를 시작했을 때 힘들기도 했지만, 주변에서 겁을 주는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이 정도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둘째를 낳고 상황이 달라졌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둘째는 당연히 엄마 손이 필요했고 달라진 상황에 첫째마저 날 달달 볶았다.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말이 단번에 이해될 정도로 힘들었지만, 주변에 도와주는 이가 없었다. 남편은 이직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너무 바빴다. 소리 지르고 화내며 끝나버린 하루 끝에 매번 울다 잠들기 일쑤였고 결국 나는 심리 상담실에 앉아 나의 육아 스토리를 횡설수설 쏟아냈다. 선생님의 질문과 내 눈물 섞인 답변이 몇 번 오갈 때쯤 상담지를 바라보며 선생님이 입을 열었다.
“여기 제일 화나는 것에 '배신'이라고 적으셨는데, 어렸을 적, 누구에게 상처 받았던 기억이 있을까요?”
순간 ‘제가요?’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항목이 꽤 많았던 탓에 나는 내가 어떤 질문에 어떤 대답을 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생각나는 대로, 고민하지 말고 작성하라던 말에 순간적으로 떠오르는 단어를 적었던 것 같은데, 나를 화나게 하는 많은 것들 중 왜 배신이라는 단어를 적었던 걸까. 코를 훌쩍이며 선생님의 손가락 끝에 '배신'이라고 적은 나의 글씨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육아하던 어제를 시작으로 시간을 거슬러 30년 전의 어느 날이 눈앞에 펼쳐졌다.
'배신'이라는 단어가 처음으로 몸 안에 흐르기 시작했던 엄마와 헤어진 그날과 비밀로 가득 쌓인 내 삶이 선생님 앞에서 덤덤히 쏟아졌다. 타인에게 처음 털어놓는 이야기였다. 이상하게 눈물은 나지 않았다. 내 이야기를 묵묵히 듣던 선생님은 단단하지 못한 지반에 나무가 쉽게 쓰러지는 것처럼, 어린 시절 겪었던 엄마와 헤어진 기억 때문에 내가 남들보다 배로 마음이 지치고 힘든 것이라고 했다. 정기적인 상담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아주 오랜만에 엄마가 없던 나의 삶을 돌아보았다.
어려서 내 별명은 울보였다. 일곱 살의 나는 옷소매가 늘 눈물 자국으로 젖어있는 아이였다. 우는 나를 보고 아이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 한숨을 쉬며 ‘또.. 왜 울어?’하고 묻곤 했다. 항상 ‘또’라는 말이 붙었다. 아까도 울고, 지금도 울고 있었으니까. 나도 내가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나도 몰라’라는 바보 같은 대답을 하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우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친구를 등지고 서서 눈물을 닦아냈지만, 눈물은 때와 장소에 상관없이 불쑥불쑥 흐르곤 했다. 잘 놀다가도 퍽 하면 눈물이 났고 사소한 질문에도 입을 떼기도 전에 눈물부터 났다.
눈물을 참으려고 숨을 크게 들이쉬고 어금니를 꽉 깨물어봐도 소용이 없었다. 그때 나는 슬픔으로 가득 찬 컵을 품에 안고 살고 있었다. 누군가의 눈빛, 말투와 행동에 조금이나마 마음이 부딪히면 위태롭게 찰랑거리던 슬픔은 곧 내 온몸을 타고 흘러내렸다. 웃을 일만 가득해야 하는 7살짜리 여자애는 매일 눈물을 삼키며 살았다.
당연한 것이 당연하지 못한 삶이 있다. 부모가 있고 친구가 있는 삶. 숨 쉬고 걷고 뛰는 삶. 울고 웃고 노래하고 음악을 듣는 삶. 누군가를 사랑하고 미워할 수 있는 삶. 누구에겐 당연한 인생의 요소들이 당연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태어날 때부터 엄마 아빠가 존재하는, 남들에겐 당연한 가족의 형태가 내 삶엔 없었다. 그런 나는 가끔 ‘엄마가 최고야. 엄마 없으면 못 살지’, ‘그래서 가정환경이 중요해’, ‘부모님 사랑 듬뿍 받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같은 말을 들으면 일곱 살 울보 별명을 가진 아이로 돌아가 또 눈물을 참곤 했다. 엄마, 아빠가 없어도 괜찮은 삶을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남들이 누리는 당연한 것들을 당연히 가지고 사는 것처럼. 엄마 아빠가 없어도 이만큼이나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걸, 그 누구보다 나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내 분노와 눈물과 절망과 무기력의 원인이 결국 부모의 부재였다는 사실에 온몸에 맥이 풀렸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눈물은 마르지 않았구나. 날 달래줄 유일한 사람, 내 눈물을 멈추게 해 줄 사람은 그때도 지금도 내 곁에 없는데. 30년이 훌쩍 지난 이제야 나는 혼자서 눈물을 참는 법을 배워 나가야 했다. 떠난 사람은 엄마고 나는 그 자리에 남아있었을 뿐인데, 내가 왜 이런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지 억울한 마음마저 들었다.
‘이게 다 엄마 때문이야.’
이런 말은 엄마 있는 아이들이나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헤어진 지 30년 된 엄마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내게 배신으로, 눈물로 남아있는 엄마를 깨끗하게 잊고 싶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서 아직도 상담실에 있다는 착각에 빠져 나는 이제 엄마와 완벽하게 헤어지겠노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