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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29. 2023

Welcome to my office!

사장의 마음으로 살림하기


 ‘신입을 하나 뽑아야겠는데..’

밥풀이 덕지덕지 붙은 그릇이 가득 찬 싱크대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리를 어디로 둔담?’

나는 좁은 주방을 훑으며 예전부터 뽑고 싶었던 식기세척기의 자리를 머릿속으로 구상했다. 이걸 저쪽으로 해서 여기에 둘까? 아무리 각을 세워도 쉽게 자리는 나오지 않았다.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주방으로 발령받은 한 달 차 신입인 밥솥과 만년 부장 정수기는 자리 양보는 절대 없다고 외치는 것처럼 은은한 불빛을 내비치고 있다. 


매끈한 모양의 흰색 밥솥은 그전에 있던 밥솥과는 다르게 스펙도 좋아서 (딱히 실무엔 쓸모없는) 죽이며 무압 솥밥이며 이유식이며 하는 가진 재주를 부릴 줄 알았고, 또랑또랑한 말투도 그전에 있던 밥솥과는 사뭇 달랐다. 원래 있던 6년 차 밥솥은 끝내 지직지직-하는 불규칙한 소리를 내다가 가전제품 수거를 통해 퇴사하고 말았다. 


 우리 집엔 계약직 직원도 하나 있는데 예민하고 눈치 빠른 공기청정기이다. 우리 집에 오자마자 자기가 얼마나 일을 잘하는지 보여주려고 뚜껑을 열어 좌우앞뒤로 흔들거리며 자신의 능력을 보여줬다. 작은 집에 너무 고스펙의 직원이 온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민하긴 또 얼마나 예민한지 미세먼지가 조금 들어온 것 같으면 자기 혼자 일하고 있는 양 뚜껑을 요란하게 흔들며 일하는 티를 팍팍 낸다. 자네, 좀 쉬엄쉬엄해.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월차를 가장 많이 쓰는 직원은 물걸레 청소기인데, 아무리 충전을 많이 해 두어도 조금 일하다 금세 빨간 불을 깜빡이며 피곤하다고 성화이다. 그럼 나는 하는 수 없이 전원을 끄고 그가 미뤄놓은 일을 손수 걸레로 닦아가며 마무리한다. 내가 저거 곧 자르고 만다. 청소기와 물걸레가 한 번에 해결되는 직원을 뽑고 싶지만, 청소기는 또 제대로 작동되는 터라 채용은 늘 미뤄지곤 한다. 


 요리 부분에선 외주를 맡긴다. 동네 반찬가게나 마켓컬리로 요리하는 시간을 확 줄일 수 있었다. 외주 퀄리티가 생각만큼 안 나오는 때도 있지만 내 솜씨론 그만큼도 어림없으니 계속 계약을 이어갈 예정이다.


우리 집에서 내가 가장 신뢰하는 직원은 세탁기와 건조기이다. 아주 가끔 때가 덜 빠진다거나 옷이 확 줄어버리는 일이 있어 실망할 때도 있지만 (그건 사장인 나의 실수일 경우가 많다) 우리 집에서 가장 묵묵하게 제 할 일을 잘해주고 있다. 


살림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사장인 나는 무얼 하느냐! 바로 지금처럼 글을 쓴다. 책도 보고, 미술관도 가거나 운동도 한다. 살림하는 시간에 아이들 책 한 권이라도 더 읽어주자-라는 게 사장인 나의 경영 방침이다. 사장이 그래도 되나요?라고 묻는다면 전 사실 사장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걸요. 하며 대답하고 싶다.

 

이 집안의 사장 격인 나는 퇴사 열망이 가득한 희망퇴직 1순위 직원이다. 사장인 나야말로 무급으로 일하고 있는데 이 일을 누가 하고 싶겠는가. 언젠가 내 일을 대신해 주는 로봇이 생긴다면 바로 채용해서 인수인계를 해주고 싶다. 그전까진 직원들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며 집의 청결을 유지하는 수밖에. 한참 주방에 서 있던 나는 우리 집 경제부 장관에게 전화를 건다.

“여보! 우리 식기세척기 사자!”

우리 집에 곧 신입이 들어온다. 연봉은 너무 높지 않되, 실수 없이 맡은 일을 척척 잘하는 센스 있는 직원이어야 할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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