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첫째의 가장 큰 관심사는 핸드폰이다. 일찍부터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친구도 있었고, 손목에 차는 키즈폰에서 스마트폰으로 기종을 변경하는 친구들도 생기다 보니 왜 자기만 핸드폰이 없느냐고 내게 우는소리를 한다. 나는 시간 관리도 못 하는 네가 핸드폰이 생기면 종일 그것만 붙들고 있을 것이 뻔하다며 (초등학생에게 시간 관리를 말하는 게 치사하지만) 핸드폰은 6학년이 되면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아이는 내 말에 아쉬워하며 입을 쭉 내밀었다. 사실 아이에게 핸드폰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남편이 쓰던 공기계를 줬는데, 그것으로 와이파이가 있는 곳에선 게임도 하고 인터넷도 하고 나와 통화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공기계다 보니 집에서만 쓸 수 있다는 점이 (아이는 밖에서 와이파이 잡는 방법을 모른다.) 아이에겐 좀 답답한 마음이 드는 것 같다.
그런 아이에게 희소식이 하나 있었는데, 이번 설에 시댁에 내려갔을 때 어머님께서 아이에게 핸드폰을 사주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약속 일자는 내가 아이에게 약속한 일자보다 3년 빠른, 초등학교 3학년이 되면. 아이는 당장 사주겠다는 말도 아닌데 금방 기분이 좋아져서 히죽거리며 웃었다. 나는 그래, 기분이라도 좋아라.. 하는 마음으로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원상이 좋겠네~’ 하고 말았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안될 일이었다. 아이가 핸드폰 사용으로 시력이 나빠진다거나, 공부에 집중을 못 한다거나 하는 이유가 아니라, 핸드폰의 번호! 그 번호 때문이었다. 시부모님과 함께 핸드폰을 개통하러 간다면 번호의 뒷자리는 분명 4929로 끝날 테니까.
나는 핸드폰을 처음 만들고 나서 거의 20년이 지나도록 번호를 한 번도 바꾼 적이 없다. 번호가 바뀌면 뒤따라 바꿔야 할 것들이 너무 많기에 큰일이 생기지 않는 한, 지금 핸드폰 번호를 죽기 직전까지 쓰게 될 것이다. 내 핸드폰 뒷번호는 6392로 끝나는데, 이건 나뿐만 아니라 우리 집의 막내 고모와 막내 고모부, 큰 고모와 둘째고모, 셋째고모 작은아빠 작은엄마 그리고 그녀들의 자녀들까지 모두 다 6392를 뒷번호로 쓴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김 씨들(그들의 남편과 아내들) 모두 6392라는 번호를 핸드폰 뒷번호를 사용하게 된 것이다. 6392 번호를 처음 쓴 사람은 우리 할머니다. 할머니와 내가 살았던 집에 유선전화의 뒷자리가 6392였다. 할머니의 자식들은 ‘윤’씨라는 성 대신에 전화번호를 물려받은 셈이었다. 내게 남아있는 6392 번호를 떠올리면 우리 집에 있던 선이 다 꼬여버린 빨간 유선전화기가 떠오른다. 언제든 집에 전화를 걸면 ‘여보세요-’ 하고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던 할머니의 음성도.
뒷자리에 똑같은 번호를 함께 쓰는 건 남편네 집도 마찬가지였다. 남편은 4929로 끝나는 번호를 쓰고 있는데, 남편뿐만 아니라 아버님과 어머님, 형님도 4929를 쓰고 있다. 형님의 남편은 4929를 쓰고 있지 않지만, 형님의 자녀들 역시 4929를 쓰고 있다. 남편의 말로 4929는 아버님과 어머님이 회사를 그만두고 여인숙이라는 숙박업을 했을 때 쓰던 번호라고 했다. 여인숙 안에 지금으로 치면 관리실 같은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유선전화번호가 4929번으로 끝이 났다고 했다. 시부모님들은 여인숙을 지나 문방구, 국밥집으로 사업을 옮겼지만 4929라는 번호는 그들의 핸드폰 뒷번호로 끝까지 살아남았다.
나는 가끔 남편과 다툰 후 아이들을 ‘김원상’‘김시안’이라고 부르곤 하는데 그때마다 아이들은 질색팔색했다. 그러면 나는 괜히 서운한 마음에 ‘김 씨가 뭐 어때서?’하고 묻고 했다. 그러자 큰 아이가 “나는 원래 유 씨잖아.” 하고 대답했는데, 나는 그 말에 “원래 ‘원래’인 건 없어! 호주제 폐지 된 게 언젠데!” 하고 아이들이 이해하지 못할 말을 남겼다. 아이들은 그래도 유 씨가 더 좋다며 대꾸했다. 나는 그래도 세상에 김 씨가 젤로 많거든? 하며 유치하게 말꼬리를 잡았다. 이름이 뭐 대수인가 싶다가도 임신도 내가 하고, 출산도 내가 하고, 하물며 젖도 내 젖으로 줬는데, 가장 중요한 성씨를 홀라당 빼앗긴 기분이랄까?
둘째를 가졌을 무렵 남편에게 넌지시 둘째는 김 씨로 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남편은‘아빠한테 물어봐. 아빠가 허락하면 나도 좋지’라며 그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라는 표정을 하고 말했다. 우리 부부의 일을 왜 아버님과 논의해야 해? 하고 톡 쏘아 말했지만 난 아예 처음부터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란 걸 알았다.
성 대신 핸드폰 뒷번호를 물려주는 머나먼 미래 세상을 상상해 보았다. 성 대신 그냥 이름으로만 불리는 세상. 성인이 되었을 때 자기가 원하는 성을 선택해서 사는 세상. 핸드폰 뒷번호로 묶인 가족은 어떤 모습일까.
그 시대엔 성에 안 차는 자식에게 ‘너! 호적에서 파버릴 거야!’ 같은 엄포는 놓는 대신 ‘너.. 번호 이동 시켜버릴 거야!’ 같은 말을 하게 되겠지. 번호로 통일된 시대엔 제사나 차례도 아주 간단하다. 휴대폰 번호로 가족을 이루었으니 전화 한 통이면 만사 오케이다. 통신사에선 고객이 설정한 날과 명절에 고인의 번호를 잠깐 열어두는데, 자손들은 열어진 고인의 핸드폰에 음성사서함으로 안부를 물으면 그만이다.
하늘나라는 어떠신가요. 어머니. 아버지는 만나셨어요?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이번에 큰 아들이 장가를 가요. 어머니, 먼 하늘에서도 우리 큰 애 잘 돌봐주세요.
그동안 제사상으로 보였던 정성은 목소리 하나면 충분하다. 휴대폰을 붙잡고 울건 웃건 그건 본인의 마음일 뿐. 어쩌면 새로운 모습의 가부장제도가 생겨날지도 모른다. 시댁에서 아이에게 무조건 우리 집안 번호를 물려줘야 한다는 압박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니 모든 권한과 선택은 핸드폰을 만드는 시점에 아이에게 주어야 한다. 자신이 쓰고 싶은 번호를 결정하거나, 엄마나 아빠 앞뒤 번호를 섞어서 쓸 수도 있다. 아마 본인이 직접 새로운 번호를 만들 수도 있고. 그렇게 된다면 그 시점이 아마 아이의 독립 시점으로 봐도 괜찮겠지?
캄캄한 밤, 자려고 누웠다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날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홀로 킥킥거렸다. 그러다 눈을 감고 잠에 빠져드는 남편을 향해 말했다.
“여보. 애들 핸드폰 생기면 뒷자리는 6392다. 알았지?”
“맘대로 해...”
남편은 눈을 감고 몽롱하게 내 말에 대꾸했다. 그러다 뭔 생각이 났는지 눈을 스스륵 뜨며 말을 보탰다.
“근데.. 6392보다 4929가 외우기 쉽지 않나?”
나는 남편의 말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찌르며 말했다.
“적당히 해. 성도 유 씨 가져갔으면서 핸드폰 번호까지 탐내냐? 애들 번호는 무조건 6392야.”
6392. 딸로 태어나 김 씨 성을 아이들에게 물려주지 못했지만, ‘윤’씨인 내 할머니가 ‘김’씨인 내게 물려준 6392 번호는 내 아이들인 ‘유’씨에게, 훗날, 최와 박과 이와 송, 그 외 등등에게 대물림되기를. 6392여 영원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