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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Jul 10. 2023

여름은 사랑의 맛이야!

팥빙수는 사랑을 타고

자주 가는 카페 앞을 지나다 새로 걸린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현수막 속엔 먹음직스러운 팥빙수와 망고 빙수, 딸기 빙수 이미지가 인쇄되어 있었다. 여름이 왔구나! 빙수 개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마치 여름이 보낸 연애편지라도 되는 것처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여름 별미를 생각하면 내 머릿속엔 빙수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달콤하고 시원한 얼음 가루들. 너무 달거나, 너무 차가워서 한 입만 먹어도 정신 못 차리게 하는 빙수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름 별미다. 요즘엔 망고, 딸기, 치즈 등등 온갖 재료들로 맛을 낸 빙수가 쏟아져 나오지만 나는 그중에서도 기본인 팥빙수를 제일 좋아한다. 이것도 얼음이 조금 덜 갈려서 이로 아작아작 씹어 먹어야 하는 옛날 팥빙수를.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무렵, 여름이 되면 막내 고모는 겨우내 찬장에서 잠들어 있던 곰돌이 모양의 빙수 기계를 꺼냈다. 매미가 노래를 시작하기도 전에 여름을 알리는 우리 집만의 신고식 같은 것이었다. 고모는 내게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아, 오늘 빙수를 먹겠구나 하고 신이 나 친구들에게 전화를 돌렸다. 바로 옆집에 사는 미희, 앞 동에 사는 은지, 길 건너에 사는 수정이와 좀 멀지만 나와 친했던 은영이까지 전화를 돌리면 아이들은 들뜬 마음을 품고 우리 집으로 모여들었다. 아이들은 좁은 주방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빙수 기계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고모가 곰돌이 기계 안에 전날 얼려둔 얼음을 넣고 곰돌이 머리에 달린 손잡이를 있는 힘껏 돌렸다. 처음엔 얼음이 매끄럽게 갈리지 않아, 손잡이를 잡은 고모의 손이 삐끗거렸지만, 이내 곰돌이 몸 밑으로 갈린 얼음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머리를 푹 수그리고 갈린 얼음이 그릇에 쌓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차곡차곡 쌓이는 투명한 얼음이 눈 같기도 했고, 작은 보석처럼 보이기도 했다. 고모는 낑낑대며 얼음을 갈았지만, 우린 그 모습마저 재밌어 보였는지 기어코 고모의 손에서 곰돌이를 빼앗아 각자 한 번씩 얼음을 갈았다.     


 다 갈린 얼음 위에 팥과 우유, 연유를 붓고 보석처럼 생긴 젤리와 손톱만 한 찹쌀떡을 올리면 끝이었다. ‘전, 젤리 많이 주세요!’ ‘고모, 전 찹쌀떡 많이요.’ 아이들의 주문에 고모는 젤리나 찹쌀떡을 한 스푼 더 넣거나 팥을 반 스푼만 넣기도 했다. 아이들은 각자 자기 앞에 놓인  빙수를 한 입 떠먹었다. 시원하고 달콤한 빙수가 입안에 퍼지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와! 너무 맛있다! 아이들이 고모에게 더 달리고 그릇을 내밀면 나는 그게 좋아서 웃긴 말을 듣는 사람처럼 계속 웃었다.      

    

고모는 여름 내내 큼지막한 얼음을 냉동실에 가득 얼려두고 쉬는 날마다 내 친구들을 불러 팥빙수를 만들어 줬다. 그땐 빙수 먹는 일이 즐거워 헤아려 보지 못했지만 나는 그것이 고모가 내게 준 사랑의 모습이란 걸 안다. 부모가 없는 조카가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진 않을까 하는 마음에 여름마다 내 친구들을 불러 모아 열심히 얼음을 갈았던 우리 막내 고모. 고모는 요란하게 달그락 소리를 내며 빙수를 먹는 친구들을 흐뭇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다른 친구들의 엄마처럼, ‘너희 부모님은 무슨 일 하시니?’ ‘넌 형제가 어떻게 되니?’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내가 밖에서 받지 않았으면 하는 질문을 친구들에게도 하지 않았다. 

   

팥빙수를 앞에 두면, 잘 갈리지 않는 얼음 때문에 기계를 품에 안아가며 온 힘으로 얼음을 갈던 고모의 얼굴과 곰돌이 몸을 통과해 반짝이며 쏟아지던 얼음조각이 떠오른다. 무더운 여름 한 시절에 어린 나를 사랑했던 고모의 마음이 달콤하게, 찌릿하게 빙수 그릇에 담겨 나를 찾아왔다. 올여름에도 팥빙수를 많이 먹어야지. 얼음이 녹은 빙수 그릇에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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