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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Feb 05. 2023

나의 3년 10개월 짜리 아빠

나의 아빠에게 

아빠. 


 아빠는 내가 글을 알기 전에 돌아가셨으니 아마 이 편지가 아빠에게 쓰는 첫 번째 편지인 것 같아. 말은 첫 번째라고 했지만 어쩌면 마지막일 수도 있겠네. 아빠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우리 큰 아이의 이름은 원상이야. 유원상. 15년도에 메르스가 한창 유행할 때 태어나 지금 벌써 여덟 살이 되었어. 이제 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응급실 한 번 가지 않고, 큰일 한번 없이 무탈하게 자란 게 나는 이상하게 이름 덕분이란 생각을 가끔 해.


 아이가 태어나기 두 달 전부터 온 집안 식구들이 아이 이름만 생각했었어. 남편의 집안이 항렬을 따져서 끝 자가‘상’으로 끝나야 했거든? 근데 무슨 글자를 붙여놔도 다 이상하더라고. 수상. 학상. 철상. 이상. 어색하지 않은 준상, 민상, 현상은 이미 너무 유명하고 아버님 말씀으론 한자 뜻이 좋지 않다나. 아이의 인생에 안녕을 바라는 마음으로 철학관에서 좋다는 이름을 돈 주고 지어와서 불러보고, 싸우고, 고집부리고, 의논하다가 결국 출생신고를 하루 앞두고 겨우 이름을 지었지. 정말 너무 사랑해서 탈이란 말이 이해가 되더라고.


 아빠. 나는 내 이름에 왜 물 수(水) 자를 썼는지 스무 살이 넘도록 알지 못했어. 빼어날 수, 순수할 수, 지킬 수 같은 좋은 한자가 많은데, 왜 하필 물 수자를 썼을까. 한 번은 복자 고모에게 물어봤더니, 고모도 깜짝 놀라면서 ‘어머? 그러게 왜 물 수를 썼다니?’ 하고 오히려 내게 되묻더라고. 할머니도 고모들도 내 이름 뜻을 몰라 다들 어리둥절할 뿐이었지.


그러다 스무 살이 넘어 처음으로 사주를 보러 갔는데 내 사주에 물이 부족하다는 사주쟁이의 말을 듣게 된 거야. “으음~ 그래서 이름에 물이 들어갔구나.” 사주쟁이는 나보다 더 궁금했던 사람처럼, 모든 의심이 다 사라진 사람처럼 흡족하게 웃더라고. 사주쟁이가 종이 위에 한자로 적힌 내 이름을 볼펜 끝으로 톡톡 두드리는데, 그때 내 머리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았어. 내가 몰랐던 사랑이 여름날의 비처럼 내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분이었지.


 아. 여기 있었구나. 엄마와 아빠가 보물찾기 하듯 숨겨 놓은 사랑을 이제야 찾은 것 같았어. 기분이 이상하더라. 스무 살이 넘고 나는 이제 다른 아이들이 받는 부모의 사랑이나 보살핌 같은 것에 무관심해졌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그게 아니었나 봐. 애써 무심한 척 굴어도 나는 아직 어렸을 적 사진첩을 뒤적이던 나에 머물러 있었던 것 같아.


 아빠, 나는 궁금했어. 내 태몽이나 태명 같은 게. 내가 돌잔치에 무엇을 잡았는지, 엄마가 임신했을 때 어떤 음식을 즐겨 먹었는지 그런 거 말이야. 내가 할머니께 집요하게 물어도 할머니는 다 모른대. 태명이나 태몽도, 돌잔치에 무얼 잡았는지는커녕 돌잔치를 했는지도 생각이 안 난다는 거야. 나는 그런 이야기들이 왜 그렇게 궁금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들을 알아야만 진짜 내가 완성된다고 믿는 사람처럼 굴었어. 그냥 몰라도 살게 되는 이야기들을.


 난 아빠가 남기고 간 게 너무 없다고 생각했거든. 사진이든 영상이든 글이든 뭐든 내가 사랑을 찾을 수 있는 단서 같은 게 말이야. 우리가 유일하게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아빠는 너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두 살쯤 돼 보이는 나는 너무 어려서 그저 아기의 얼굴을 하고 있고. 그 사진 속에서 아빠가 내 볼에 뽀뽀하고 있거나, 활짝 웃고 있었더라면 좋았겠다, 하는 생각을 했었어. 날 무릎에 앉혀두고 카메라를 바라본 아빠의 표정이 무거운 짐을 껴안고 있는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가끔 생각했어. 나는 엄마 아빠가 오래 기다린 선물이었을까.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짐이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나는 해답을 찾는 사람처럼 엄마와 아빠의 결혼식 사진을 들여다보곤 했어. 마음속으로 묻고 또 물어도 사진 속에 엄마, 아빠는 그냥 침묵한 채로 있었지만. 


 내가 이 사실을 좀 더 빨리 알았다면 어땠을까. 내 이름에 담긴 의미를 말이야. 그랬다면 나는 장롱에서 무거운 앨범을 억지로 꺼내 드는 일은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이름 한 번 대충 지었네.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을 텐데.


 아빠 그거 알아? 원상이가 막 태어났을 때, 아이를 안고 가만히 얼굴을 바라보는데, 보이지 않는 커다란 손이 내 머리를 쓰다듬는 것 같은 기분이 들더라. 아주 어렸을 적에 누군가 오늘을 예상이라도 한 듯 몇 번이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던 그 손길이 이제야 느껴지는 것 같았어. 마치 내가 안고 있는 아이가 누군가 보내 준 선물 같은.. 그런 생각이 들었지. 아빠, 나는 원상이를 보면서 내가 몰랐던 어렸을 적 나를 떠올려보곤 해. 우리가 지어준 아이의 이름을 마음껏 부르면서, 사랑한다는 말을 넘치도록 하면서, 작은 몸을 껴안고 연한 볼에 입술을 가져가며 나는 어린 나와 엄마와 아빠를 상상해. 미신일지라도 나의 인생이 평안하길 기원하는 마음으로 철학관을 찾는 아빠의 발걸음과 나를 품에 안고 내 이름을 처음 발음하는 엄마의 입술을 생각해.  내 아이가 태어나고 내가 했던 모든 일에 자꾸 엄마, 아빠가 보여.


 아빠. 나는 내 인생이 메마른 사막 같을 때 내 이름에 새겨진 커다란 강을, 호수를, 바다를 떠올려. 그리곤 내 앞에 놓인 불안과 걱정이 큰 파도에 휩쓸려 사라지는 것을 느껴. 조금 우습지만 나는 이걸 아빠와 엄마가 심어 놓은 사랑의 힘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어. 비록 아빠와 엄마는 오래오래 내 이름을 불러보지 못했지만, 내 주변에 많은 이들이 내 삶에 단비를 뿌려주고 있어. 수현아. 수현아. 이름을 부르면서. 그 사람들은 이미 내 이름의 뜻을 알고 있던 것처럼 참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줘.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고 분에 넘치게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 이게 엄마와 아빠가 바라던 나의 삶이겠지.


 아빠. 언제 내 꿈에 한 번 와 줘. 내가 아빠를 몰라보고 지나치더라도, 한 번 와서 지금의 나를 보고 갔으면 좋겠어. 혹시 아빠가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몰라 다른 사람의 꿈에 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 곧 성묘하러 갈게. 내 얼굴, 우리 원상이 얼굴 마음껏 보고 꿈에서 만나요.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를 쓰면 늘 건강하라고, 행복하라고 맺음말을 쓰는데 이 편지에 그렇게 쓰는 건 좀 이상하네. ㅎㅎ


아빠. 곧 만나.


당신의 딸 수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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