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 아닌 사람으로
2004년, 스무 살의 겨울. 내 두 번째 수능이 끝났다. 합격 발표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고 싶었지만, 입학 후 쓸 용돈이 필요했다. 알바천국에 접속해 단기 알바를 찾아보았다. 들어가기만 하면 남자친구가 생긴다는 극장 매표소 알바를 찾아보았는데 이미 모집이 끝난 뒤였다. 기왕이면 몸을 쓰는 일 보다 앉아서 하는 일을 하고 싶어 사무보조를 찾았지만, 단기 아르바이트생을 쓰는 곳은 없었다. TM, 서빙, 영업 같은 단어들을 따라 무의미하게 마우스 휠을 내리던 그때 ‘사무보조’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장소는 집에서 가까운 대형마트였다. 업무는 주차 안내 및 사무보조. 밖에서 하는 일과 안에서 하는 일을 어떻게 한 사람이 할 수 있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집에서도 가깝고 근무시간과 페이도 마음에 들어 지원하기 버튼을 클릭했다.
고모는 ‘그 일은 사무보조가 아닌 주차 안내 일’이라며 나를 말렸지만 나는 고모의 성화에도 면접을 보러 갔다. 이력서를 들고 찾아간 곳은 대형마트의 주차장 옆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고 쓰인 사무실이었다. 이 마트를 몇 번을 왔었으면서도 이곳은 처음이었다. 동그란 손잡이를 잡자 차가운 기운이 손바닥에 전해졌다. 조심스럽게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왼쪽에 놓인 세 개의 책상과 의자가 눈에 들어왔다. 오른쪽엔 6인용 공용 테이블과 의자가 있었다. 벽에 걸린 스케줄 표엔 뜻 모를 이름과 숫자들이 적혀있었다. 누가 쫓아오기라도 했나, 나는 날림으로 쓰인 글씨를 보며 생각했다. 그 앞엔 충전 중인 무전기가 놓여있었다.
나는 공용 테이블에 앉아 대리라는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리라고 하는 남자는 꽤 젊어 보였다. 나이가 많아봤자 스물일곱? 속으로 남자의 나이를 가늠해 보는데 내 이력서를 훑던 남자가 입을 열었다.
“영어는 좀 해요?”
“잘은 못 하고.. 조금..”
내가 말끝을 흐리자 남자는 테이블 위에 펜을 들더니 내 이력서를 뒤집어 뭔가를 끄적였다. 사무보조를 하려면 영어를 좀 알아야 하나? 무슨 테스트지? 나는 긴장이 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읽어봐요.”
나는 남자가 내민 종이를 훑었다. 종이 위엔 SONATA, SANTAFE, AVANTE 같은 차종이 적혀있었다.
“소나타..산타페.. 아반떼..요?”
남자가 쓴 단어를 읽으면서도 이게 무슨 테스트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그러더니 이번엔 나더러 그랜저, 마티즈 스펠링을 적어보라고 시켰다. 나는 남자가 내민 펜을 건네받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사무 보조하려면 차 종류를 많이 알아야 하나요? 제가 차는 잘 몰라서..”
“그냥, 어느 정도만. 고객들이 가끔 주차를 어디에 했는지 모를 때 찾아달라고 할 때가 있는데 그 차가 뭔지 모르면 안 되니까.”
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력서 뒤에 스펠링을 적는데 정수리 위로 남자의 목소리가 쏟아졌다.
“그리고 사무보조 일은 나간다고 했던 직원이 계속 다니기로 해서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주차 업무만 보면 돼.”
순간 움직이던 펜이 멈칫했다. 아, 그냥 갈까. 잠깐 갈등하는 사이, 남자는 선심쓰 듯 내 앞에 놓인 주스를 따, 내게 가까이 내밀었다.
“평일엔 차도 별로 없고, 그냥 주차장에 서 있기만 하면 돼.”
나는 다시 천천히 펜을 움직였다.
나는 남자의 뒤를 따라 마트 옥상으로 올라갔다. 차가운 공기에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마주 선 남자는 1초라도 빨리 내려가고 싶은 표정이었다.
“나 따라 해. 안녕하십니까~ 위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왠지 웃음이 날 것 같았다. 너무 어색해서. 친구라도 곁에 있으면 푸하하 얼굴을 마주하고 웃었을 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진지한 얼굴을 하고 남자를 따라 했다. 한 손은 배꼽 위로, 또 한 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안녕하십니까, 위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안쪽으로 이동해 주십시오. 안녕하십니까. 잠시 대기해 주십시오.
내가 마트에 올 때마다 이 소리를 들었던가. 주말마다 고모부 차를 타고 이곳에 오며 내가 몇 번이고 들었을 말들이 난생처음 듣는 것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겨울 하늘에 내 목소리가 크게 울렸다. 처음엔 쑥스러움이 일었지만 반복하다 보니 쑥스러운 마음도 이내 사라졌다. 남자는 구석으로 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내 목소리를 노래 삼아 남자는 담배를 태웠다. 나는 고장 난 로봇처럼 허리를 숙였다가 일어나 같은 말을 반복했다. 목소리는 커졌다, 작아지고, 다시 작아졌다 커졌다. 남자의 입에서 뿜어 나온 담배 연기가 찬 공기를 따라 흩어졌다.
내가 속한 주차 업체는 마트의 하청 업체였다. 하청 업체 직원인 남자 팀장 한 명과 과장, 대리, 사원 네 명이 사무실을 지켰고, 그 외 열 명 정도 되는 직원들은 대부분 나처럼 수능을 보고 결과를 기다리는 아르바이트 생이었다. 몇몇 정직원 신분인 아이들도 있었다. 정직원 중 한 명이었던 정아는 대학교를 진학하는 대신 고등학교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바로 이곳으로 취업한 아이였다. 정아는 나보다 한 살 어린 동생이었는데, 오히려 언니처럼 나를 잘 챙겨줬다. 처음 이곳에 왔을 때부터 ‘언니, 언니’하며 살갑게 대해 주고, 더 뛰어야 하는 일은 본인이 도맡아 했다. 면접 본 다음 날, 나는 바로 주차장에 서게 되었다. 사무실에서 받은 근무복과 모자를 써야 했는데, 노란색과 곤색이 섞인 점퍼 형태의 근무복은 언제 빨았는지 소매가 새까맸다. 정아는 그중에서도 가장 깨끗한 걸 찾아 내게 건넸다. 모자 안쪽이 이마에 닿는 게 싫어서 휴지로 이마 부분을 덧대 썼다. 그것 역시 정아가 알려 주었다.
주차장은 지상 4층부터 8층까지 총 4개 층이었는데 7층까진 2인 1조로, 8층은 혼자 일을 해야 했다. 2인 1조로 구성된 팀 중 한 명은 주차장 입구에서 차를 안내하는 역할을 했고, 나머지 한 명은 빈자리를 찾아 앞에 서 있는 조원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했다. 자리가 하나 비어 있으면 팔로 숫자 1을 그렸고, 두 개가 나 있으면 허공에 숫자 2를 크게 그렸다. 우리는 OK란 수신호로 자신의 오른쪽 어깨를 두드렸다. 차가 주차하거나 빠질 때 행여나 다른 차를 박지 않는지 눈치껏 확인해야 했다. 나중엔 요령이 생겨 멀리서 봐도 어디서 차가 빠지는지 알 수 있었지만, 초반엔 이리저리 빈 곳을 확인하러 뛰어다니느라 녹초가 되었다.
가끔 차가 적게 들어오는 평일엔 주차장 입구에서 발권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샛노란 파카를 입고 노란 모자를 쓴 채 1층 주차장 초입에 섰다. 입술엔 붉은색 립스틱을 발랐다. 날이 추워 얼굴이 꽁꽁 얼 것 같았다. 저 멀리 차가 진입해 들어오는 게 보이면 나는 재빨리 자세를 가다듬었다. 차가 내 옆으로 서면 나는 주차권을 뽑아 무릎을 살짝 굽혀가며 공손하게 주차권을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즐거운 쇼핑 되십쇼~”
내가 그렇게 인사하면 누구는 예~하고 대답하고, 누구는 말없이 주차권만 받아 얼른 창문을 닫았다. 누구는 ‘고생하세요’ 했고 누구는 ‘어머나, 아가씨 너무 예쁘네~’ 하며 얼굴을 쑥 내밀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합니다’하고 대답했다. 행여나 누가 내 표정이 무뚝뚝하다고, 주차권을 한 손으로 뽑았다고, 목소리가 별로라고, 못생겨서 쇼핑할 기분이 안 난다고 민원을 넣지 않을까 걱정했다. 그런 사람들이 진짜 있다니까요. 별 사람 다 있어요. 언니. 나는 전날 정아가 해줬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알바든 정규직이든 할 것 없이 새로 들어온 직원들은 필수로 직원 교육을 받아야 했다. 직원 교육은 마트 점장이 직접 강의하는 내용을 듣는 것이었다. 직원 교육은 말이 ‘교육’일 뿐 마트에 대한 자랑이 대부분이었다. 점장은 교육 말미에 이곳이 전국 2위 매출을 달성할 수 있었던 건 직원 여러분의 노고가 있었기에 가능하단 이야기를 덧붙였다. 그리고선 고객의 동선을 따라 만나게 될 직원들 하나하나 뽑아가며 그들의 중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고객이 차를 타고 마트에 들어선 순간부터 계산 후 출구로 나가기까지, 직원들은 어떤 표정과 행동을 해야 하는지 늘어놓았다. 오직 친절, 행복 미소, 그것이 우리가 가진 소명이자 사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