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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02. 2024

어떻게 더위까지 사랑하겠어, 여름을 사랑하는 거지

올여름은 ‘역대급 무더위’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사람들의 뇌리에 콕 박힐 24년의 여름일 테지만 나에겐 오래 기억될 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이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서 살아생전 처음으로 달리기에 도전한 것이다. 지난 40년간 내 두 다리를 빨리 움직이게 한 것은 정류장에 도착한 버스나 깜빡이는 초록 불,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소리 같은 것일 뿐, 오로지 달리기를 위해 달렸던 적은 없었다. 학창 시절 운동회 때 응원단장을 했으면 했지 계주는 내 역할이 아니었고 헬스를 다니며 유산소를 할 적에도 러닝머신 위에선 늘 ‘빨리 걷기’만 했다. 숨이 차고 땀이 나는 일은 생각만 해도 고통이었다.


달리기가 내 머릿속에 들어온 건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를 한 후였는데, 집 근처 커다란 공원엔 달리는 사람들로 인산인해였다. 이사 오기 전에 살았던 아파트 단지엔 딱히 뛸만한 공간이 없기도 했고, 뒷산이 있어서 뛰는 사람보단 천천히 산을 오르는 사람들을 더 많이 봤었다. 그래서 남편과 나는 공원에 러너들을 처음 보고 ‘우와! 사람들 뛴다!’ 하며 소리를 질렀더랬다. 아이스크림을 손에 쥔 채 슬리퍼를 질질 끌며 걷는 우리 곁으로 몇몇 사람들이 거친 숨소리를 내며 저만치 뛰어갔다. 그들은 느긋하게 걷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달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땀에 젖어 색이 더 짙어진 티셔츠와 땀으로 번들번들해진 목덜미가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뛰고 싶다는 마음보단 어떻게 이 날씨에 뛰는 거지,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그렇게 뛰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다시 1년이 지났고, 나는 한 살을 더 먹었다. 서른아홉에서 마흔. 엉덩이에 1kg 추가 매달린 것처럼 자꾸만 어딘가에 앉고 싶고 눕고 싶었다. 살은 계속 찌고 무릎과 허리는 40대 입성을 기념이라도 하는 듯 동시에 삐거덕 거리기 시작했다. 필라테스와 요가, 헬스, 복싱 등, 일단 운동을 하려면 돈과 시간이 필요했다. 시간은 만들면 된다 쳐도 돈은 만들고 싶어도 만들 수 없었기에 제일 돈이 안 드는 달리기를 선택했다. 마음이 맞는 친구 몇몇과 러닝 크루를 만들었다.  일주일 동안 뛴 거리로 순위가 정해지는데 다들 상위권에 가려고 열심히 뛴다.


저녁 8시가 되면 나는 슬금슬금 운동복으로 갈아입는다. 가족들의 식사를 챙긴 뒤 아이를 씻기고 재우는 일은 남편에게 맡긴 채 줄행랑을 친다. 근처 헬스장에 가서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러닝머신 위를 경쾌하게 달릴 수 있겠지만, 나는 여름밤의 무더위를 선택한다. 스트레칭을 하며 오늘은 5km를 뛸까, 7km를 뛸까 고민하지만, 막상 달리기 시작하면 그냥 2km만 뛸까,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크게 숨을 들이쉴 때마다 공기와 물이 폐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 밤 온도도 30도를 육박한다더니.. 헬스장으로 갈걸, 하고 후회해도 이미 늦었다. 오늘의 응원가는 에스파의 <next level>. 음악의 힘이란 참으로 요상해서 전주만 들어도 명치에서 힘이 바짝 솟는다. 왠지 오늘은 7km 넘게 뛸 수 있을 것 같은 착각마저 든다. 2km가 넘어가면 호흡도 어느 정도 안정이 되고 굳어 있던 어깨와 다리도 차츰 가벼워지는데, 그제야 함께 뛰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온다.

한 바퀴에 1km가 조금 넘는 공원엔 달리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깡충깡충 점프하듯 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몸이 뛰는데 엉덩이가 씰룩씰룩 움직이는 사람도 있다. 또 과연 뛰는 건지, 걷는 건지 알 수 없을 만큼 느리게 뛰는 사람도 있다. 토끼와 오리, 거북이 곁을 지나며 나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궁금해 함께 달리고 있는 내 그림자를 유심히 보게 된다. 나는 토끼와 오리, 거북이가 한데 섞인 괴상한 모습을 하고 있다.


달리는 도중에 가장 유심히 보게 되는 건 앞서 뛰고 있는 사람의 발이다. 러닝 주법이 미드풋인지, 힐풋인지, 운동화는 어떤 걸 신었는지, 종아리 두께는 굵은지, 얇은지 보면서 저 사람이 초짜인지, 좀 뛰어 본 사람인지 혼자 맞춰본다. 그렇게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자세가 영 어색한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이 오늘 내 맘속의 경쟁상대가 된다. 오늘만큼은 내가 당신을 이기겠어! 혼자 결의에 찬 상태로 속도를 올린다. 그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대방은 조금 뛰다가 바로 걷는다. 그래서 나는 매번 쉽게 이긴다.


마지막 1km가 남았을 땐 온몸이 땀 범벅된다. 머리에 분수가 열렸는지 두피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진다. 1년 전, 이 공원에서 보았던 땀에 젖은 티셔츠와 번들번들한 목덜미가 떠오른다. 오늘의 목표였던 5km를 뛰고 몸을 내던지듯 벤치에 앉는다. 오늘의 페이스는 6분 45초. 6분 30초 안쪽으로 뛰는 게 목표였지만 올해 안엔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아이고-하는 소리가 저절로 튀어나온다. 숨을 크게 들이쉬고 내쉬며 가파르게 들쑥날쑥하는 가슴을 천천히 달랜다. 휴- 긴 숨을 입 밖으로 천천히 내뱉자 구레나룻에 매달려있던 땀이 또르르 흐른다. 벤치에 앉아 숨을 고르는 와중에도 사람들이 내 앞을 지나쳐 뛰어간다. 아까 찜했던 내 경쟁상대도 보인다.


밤 9시에 가까운 시간이지만, 물줄기를 뿜어대는 분수로 공원은 한낮처럼 활기차다. 정말로 한낮인 것처럼 꼬마들이 비명을 지르며 물을 가르고 있다. 갑작스레 튀어 오르는 물줄기에 영락없이 옷이 홀딱 젖는다. 곁에 커다란 수건을 들고 선 보호자들이 짝다리를 하고 서 있다. 무슨 심사가 뒤틀렸는지 갑자기 짖어대는 강아지 때문에 아주머니가 황급히 목줄을 당겼다. 저만치 뛰어가는 사람을 보고 강아지가 계속 짖는다. 공원 건너편, 환한 라이트로 밝게 빛나는 농구 코트엔 많은 남자들이 골대로 공을 던진다. 공이 튕기는 소리가 불규칙하게 들려온다. 고개를 들면 환한 가로등 불빛에 초록 잎은 더 짙은 색을 내뿜고 있다.


둥둥 커다랗게 울리는 심장박동과 빙빙 도는 사람들과 소리를 지르는 아이들과 총총 걷는 강아지와 통통 튀어 오르는 농구공과 패스-패스 소리 지르는 남자들. 나는 이 생명력 가득한 여름밤을 품 안에 꼭 끌어안고 싶어 진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주인공처럼 넋을 놓고 자꾸만 그 모습을 바라보게 된다. 9월이 되고 찬바람이 불면 분수도 잠이 들고 아이들의 비명도 잠잠해질 것이다. 나무는 앙상히 메마르고 농구 코트엔 듬성듬성 낡은 눈덩이만 남게 되겠지. 황폐한 공원의 겨울을 떠올리면 매서운 바람을 맞은 것처럼 어깨가 움츠러든다. 

여름은 포악하지만 그래도 어깨를 움츠리게 하지 않잖아! 하지만 사람들은 요즘 같은 여름보단 차라리 겨울이 낫다고 말한다. 찜통 같은 더위, 느닷없는 비, 살을 꼬집는 것 같은 햇볕,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벌레, 날이 갈수록 무자비해지는 여름이 횡포에 사람과 동물, 식물까지 지쳐간다. TV에선 올해가 가장 시원한 여름이라고 하던데, 나는 내년에도 여름을 사랑할 수 있을까. 매년 여름마다 이 풍경을 다시 볼 수 있을까.


여름을 가장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 ‘미친 인간!’ 소리를 듣는 요즘, 나는 최대한 여름을 좋아하지 않는 척 연기 중이다. ‘여름이 돌았다. 빨리 가버렸으면 좋겠다. 가을아, 빨리 와라’ 같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대며 사람들의 눈치를 보고 있다. 여름이 왜 좋냐고 묻는다면, 글쎄. 좋은 걸 좋다고 일일이 설명할 수 있으려나. 그저 둥둥, 요란하게 심장이 뛰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겼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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