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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먹을 자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을 때 하는 자유

라면만큼은 내 방식대로


얼마 전 SK 최태현 회장의 인터뷰를 보았다.

인터뷰에서 그는 자유로운 시간이 가장 중요하며,

일과 중 "라면을 내 방식대로 맛있게 끓여 먹을 때"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마자,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대기업의 총수인 그가 주방 한 곳에서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있을 생각을 하니, 일상에서 가장 홀가분한 순간이 그려졌다.  "그러~~취! 바로 그거지! :)"


오래전 제법 조선 후기 전통을 잇고 살아가는 뼈대 있는 집안에 시집간 이모가 말해준, 라면에 관한 일화가 생각났다. 온갖 예법을 지키는 집안이지만, "라면을 끓이는 공간"에서 만큼은 각자의 방식대로 끓여 먹게 돼 있어 그 누구도 다른 이의 라면에 간섭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시에도 갖가지 제기들이  저리잡은 부엌라면만큼은 각자, 자기 구미대로, 아무 때나 끓어먹게끔 해뒀다는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이모네 이야기 역서 지금 와서 최태현 회장의  "라면 먹을 때의 해방감, 자유"와 일맥상통해 생각이 난다.

@치즈라면

왜 하필 라면인가?


20대에는 한 밤에 라면을 끓여 먹고도 아무렇지 않게 잤고, 그렇다고 한들 아침에 얼굴이 붓거나 위산이 넘어오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라면은커녕, 8시 넘어 식사는 아무래도 부담된다. 이만하면, 라면 먹을 자유가 아무 때나 누구에게나 허용되지 않는 것을 알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라면은 사람에 따라서 제각각이다.

누구는 반드시 꼬.들.꼬.들. 먹어야 하고, 누구는 푹 삶은 면발로 먹어야 하며 수프를 먼저 넣을지 면을 먼저 넣을지도 의견이 분분하다. 라면에 계란이나 파를 넣는 방식은 또 어떻고! 그러니 라면을 끓여 먹는 것이 자유란, 엄청난 의미가 내포돼 있는 것이다.


라면을 먹는 그 소중한 시간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재벌 기업중 곳의  총수가 고작 라면 먹을 때 진짜 자유를 느낀다니, 라면 맛 좀 아는 사람으로서 공감도 되고 그에게도 좀처럼 일신의 자유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 이해되기도 했다.

@해물라면

사회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중요한 자리에 앉을수록, 자기 통제력이 높아지기 마련이다. -안 그러신 분들도 있겠지만, 그래야하지 않을까-

인간에게 허락된 자유라는 것은 방종이 아닌 이상, 선택지가 많은 가운데 자기 나름의 절제와 통제가 수반된다. 그것이 인간의 정체성이요 사회성이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때문에 그 자체로 이상하거나 안쓰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나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다.


그리고 꼭 사회적 완장이 무겁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누구나 인생의 짐은 어렵고 그 왕관의 무게 제법이다. 이처럼 각자의 상황은 다르더라도 인생에 뭐 특별한 행복을 좇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대신 라면이 주는 작고 확실한 행복을 만끽하면 어떨까.


내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만큼 먹어보기


12월이다.

한 해로 치자면, 마지막 달이고 한 달로 치자면,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날들이다.

그래서 나는 12월에는 연초의 계획들과 소망했던 것을 살펴보곤 한다. 딱히 거창한 계획도 목표도 없었지만, 운동과 운전을 해내겠다- 는 확실하지만, 여간해서는 쉽지 않았던 목표들이 있었다. 결과는 어쨌거나 뛰어넘은 부분이 있다. 여태 필라테스며, 조깅이며, 산책 등등 앵간해서는 해결되지 않았던 운동으로 인한 만족감이 PT 수업을 받으면서 꾸준히 해온 헬스로 만족됐다. 그리고, 십 년간 장롱 면허로 두었던 나의 운전도 올해는 현실이 됐다. 그 외 연구자로서 활동을 1%는 더 해보겠다는 태도에서의 변화도 어쨌거나 확실한 성장이 있었다고 자부해 본다.


그리고 한 가지가 더 있다. 변명 같지만, 이 어려운 숙제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한 것 같다. 아직 결판난 것은 아니지만, 남은 12월 동안 주사위가 땅에 떨어진 값을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란다.

나 역시 하루키만큼이나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을 때 강요받는 것을 예전부터 참을 수 없었다.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中-,

그래서 그간 꾸역꾸역, 자기 부인하며 살아왔던 것을 이제 멈추고 싶다.- 물론, 하고 싶은 것을 자신이 원하는 때에 하는 인간이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때론 인내도 필요하다. 나는 그 시간을 통해 성장해 왔다-

이제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하고 싶을 때, 내가 하고 싶은 만큼 해볼 수 있다면, 나도 누구 못지않게 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자, 라면 먹으러 가야겠다.

@지나가던 강아지도 뒤돌아볼 것 같은 강북 고즈넉한 포차의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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