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프란시스코의 기도를 읽다 보니 마음에 힘이 차오른다. 이보다도 명확한 삶의 기준이 있을까!
마음이 가득 차지 않을 때 나는 얼마나 지루해하고, 길을 잃던가.
세상에는 성공과 즐거움에 대한 공식이 있지만, 성탄절에 이땅에 오신 예수의 인생에서는기도문에 나타난 모습이 삶의 전부였다.
온통 세상은 자기를 먼저하고 위에 서는 것이 주도적인 삶이라며 연일 말해온다. 너 먼저 챙기라고! 일어서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와 잎으로 기쁨과 사랑을 내보내니까! 하지만 잘 포장된 피해자임을 자처하는 논리들은 정답이 되기 어렵다. 그중에서는
인본주의에서 한발 나아가 자기중심적이기만 한, 오직 자기감정이우선돼야 겨우 사람구실할 수 있다고 한다.
@토론토로 날아간 크리스마스 , 희봉이가.보낸 선물을 찾아라
그런데도우리가 아는 사랑의 가치는 다르다.
모두가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고 상처받기 두려워숨죽이고만 있다면,
언젠가 다리에 힘이 풀린 것 같은 그런 날
손 내미는 누군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성탄절의 의미를 생각하면
나와 관계 속에서
관용과 용서, 이해는 너무나 중요한 것들이다.
2023년한 해를 돌아보며 성경의 가치를 배우기 위해 결코 녹록지 않았단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십자가의 겸손과 사랑, 용서는 우아한 자리의 것들이 아니었다.십자가는 당시 살인과 같은 극악무도한 자에게 취해지는 형벌였다. 십자가의 영광은 그야말로 아이러니한 말이다. 진정한 용서와 이해는 겉으로 보기에 패배한 자의 관용이다. 따라서 결코 인간의 눈으로 멋있어 보일리가 없는 자리에서 취하는 결단이다.
십자가의 사랑과 겸손은
바로 예수가 짊어진 외면과 수치의 무게임을,
삼 심대 중반에서나 돼야 깨달았다.
용서는,
나보다 오래 살아 세상 분에 넘치는 자리에 있음에도, 용서치 못할죄를 범한 사람에 허락해야하는 것이었고
이해는,
내깐에 극진하게 베풀었음에도 어려 경험이 없어 참을성 없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에게 내가 깊어져야 하는 것이었다.
관용은, 손바닥 만한 나의 의로움, 기준에 넘어갈 때마다 파닥거리는 마음의 기준을 낮추는데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나에게도 필요한 가치이기도 하다.
처음엔, 몇 가지 죄성을 극복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술 먹고 방탕하고 쾌락을 좇지 않는 자리에 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사회적인 페널티를 받기도 했다.
"하나님, 이즘 했음 됐지 않아요?"라고 했는데,
아니라고 하신다.
그래서 내가 꿈꾸던 세상적인 소망을 하나둘씩 내려놓았다. 저는 이제 아무래도 좋아요!라고 고백하며 두 번째 직장에 들어갔다.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내가 쓸 에너지와 재테크에 쓸 물질을 주변 사람에게 나눠줬다. 성과급이라도 받곤 하면, 아까워하지 않고 여기저기에 베풀었다. 그러면 내가 가진 곳간을 넘치게 해 주실 줄 알았다.
"하나님, 이 정도면 87점은 되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것으로 안된다고 하신다.
이제 알았다. 내가 절대자의 만점에 이르기까지, 나는 그냥 평안 안에서 내 손을 펴봐야겠다.
자연의 오묘함에 더 감격하고, 내 눈밖에 넘어간 세상 사람들을 관용하는 마음이 가득해질 때까지
하나님의 훈련은 계속될 것이다.
믿음이 있든 없든, 아마 인생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인생은 쉽지않은 과정이다. 인생의 단짠은 믿음이나 가치를 훈련하는 사람들의 숙명으로,
인생은 육체의 한계를 가진 작은 인간이 성숙해지기 위한 시험대이거나 훈련소가 아닐까.
그 모든 사람들이 넉넉히 감당하는 한 해였을 것이다.
신이 사람을 가리지 않고
때때로 넘치게 공급하시는 인생의 쿠키들과 함께!
-*주의* 가끔 쓰거나 텁텁한 맛이 날 수도 있습니다.-
@성탄, 그 감격을!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때로는 잠잠히 설득하시며 때로는 과감히 간섭하셔서 마침내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나가실 것입니다.... 이 감격스러움 외에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은 자를 가리켜 예수 믿는 사람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