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워킹맘 엄마가 집을 비운 동안

불 끄는 건 무서워

몇 년 전 데이팅 앱을 휴대폰에 깔았다. 내 짝이 영 오질 않으니 스스로 찾아보자는 목적에서였는데,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지만 눈에 띄는 이용자 해시태그가 있었다. 바로 “90년대 바이브”.


지금 20, 30대인 나보다 어린 친구들이 1990년대 문화나 감성에 관심을 두는 트렌드가 있다고 하는데 그것을 염두에 둔 데이팅 앱의 해시태그인 듯했다. 1990년에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우리 집안은 다사다난한 시대였다. 엄마는 아빠와 이혼을 한 후 어느 산엔가 있는 기도원에 금식기도를 가서 우리를 지키고 살아가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아이들을 버리고 누군가 다른 사람과 함께 행복한 들 10년 정도쯤이 아닐까 싶었다고 한다. 그러기엔 나와 동생의 남은 삶이 둘이 합쳐 100년도 넘는다는 생각에 기도원에서 내려오며 마음을 정했다고 했다. 기도원에서 만난, 가정사가 순탄치 않아 슬픈 삶을 살아온 사람들을 보며 여러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나와 동생 둘을 데리고 싱글맘으로 살기 시작한 엄마는 생활력이 강했다. 요즘도 엄마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자는 연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사실이었다. 엄마는 기업의 영업 담당자로 일했다. 출판사에서도 일하고 나중엔 화장품 회사에서도 일했다. 집에는 덕분에 책이 많아서 나는 책도 많이 읽고 우리 집에 책을 빌리러 온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투닥투닥 싸우기도 하며 지냈다.


워킹싱글맘의 딸이니 혼자 할 줄 아는 것들이 있어야 했다. 난 초등학생이라 키가 작으니 싱크대에 식탁 의자를 끌고 와서 그 위에 올라가야 프라이팬 속이 보였다. 그렇게 의자에 서서 어설프게 달걀 프라이를 만들어본 기억이 난다. 엄마가 없을 땐 동생과 둘이서 엄마가 미리 해둔 식사를 차려 먹어야 했다. 그때 간편한 인스턴트 카레나 짜장도 많이 사 먹었다. 요즘은 추억의 맛으로 먹지만 20~30대 한동안은 물렸다는 생각에 싫어하는 음식이었다.


다행히 집에는 동네 친구들이나 친구 어머님들이 가까이에서 자주 왕래했고 아파트 경비실도 있어서 동생과 둘이 낮 시간을 보내기에 크게 위험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대체로 제때 퇴근해 왔지만 한 번은 밤 10시가 넘도록 늦는 날이 있었다. 그즈음 나는 동생을 어르고 구워삶는데 약간 탁월한 기술을 닦고 있었다. 칭얼대는 동생을 잘 구슬려서 같이 만화 주제가 같은 걸 들으며 어질러 둔 집안 청소를 하거나, 엄마가 없어도 동생이 잘 잠들 수 있게 이부자리에 들어가도록 재촉하거나, 오히려 지금보다 의젓한 언니였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래도 10시까지 엄마가 안 오니까 조금 불안했다. 우리는 잘 시간이니 나는 동생을 뉘어 놓고 자자고 재촉했는데, 누가 방의 불을 끌 것이냐로 실랑이를 하게 됐다. 왜냐하면 방 불을 끄면 무섭고, 불을 끈 사람은 이부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어둠 속에서 더 공포를 느껴야 하기 때문이다.


“언니가 끄란 말이야~! 어엉”


서로 미루다 먼저 울음을 터뜨린 건 동생이었는데, 어느덧 나도 무서워져서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직 깜깜한 어둠이 무서운 어린아이들이었던 것이다. 둘이 엉엉 울고 있자니 마침 엄마가 도착해 우리 둘을 얼싸안았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던 것 같다.


“90년대 바이브”라고 하면 비교적 풍요롭던 그 시대의 틴에이저 패션이나 대중가요 문화 같은 것도 생각나지만, 개인적으로는 슬픔과 의젓함이 뒤섞여 있던 우리 집 두 아이의 모습도 떠오른다. 우리는 어린 시절 서럽기도 했고 싸우기도 많이 했지만 그래도 씩씩한 엄마 옆에 씩씩한 우리가 매달려 크게 엇나가지 않고 학업도 마치고 직업도 가질 수 있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인가는 시험 전 날 내가 구구단을 다 외울 때까지 엄마가 계속 구구단 퀴즈를 늦은 밤까지 내주어서 졸면서 7 곱하기 7은 49를 외치기도 했다. 좀 괴롭긴 했지만 다음 날 덕분에 전 과목 100점을 받은 것은 엄마의 기쁨이 되었다.


엄마의 자랑에 대해 떠올리니 내가 지금도 엄마의 자랑인지 의문이다. 직업은 가졌지만 흔한 "엄친아"들처럼 고연봉의 화려한 타이틀도 아니고, 동생과 달리 나는 손주도 안겨 드리지 못했다. 그냥 엄마 곁에서 소소한 행복을 누리며 함께 살아가는 일이 내가 하는 전부다.


그래도 엄마는 매일 노심초사 나를 걱정한다. 야근이 늦어져 지쳐 돌아오면 그만둬도 된다고 성화를 하고 기온이 조금만 내려가도 내복에 롱패딩을 입으라고 잔소리를 늘어놓는다. 본인도 일을 마치고 돌아와 힘든 저녁 시간에도 나를 위해 기꺼이 부엌에서 뭔가를 또 만들어주시는 엄마.


사람들이란 저마다 아름답고 모습이 각기 다른 꽃이라고 하는데, 엄마는 딱히 화려하진 않지만 들꽃 같은 우리 둘에게 물을 듬뿍 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만든 사랑의 정원 안에서 나는 매일 자유롭게 흩날린다.




작가의 이전글동생을 질투한 K-장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