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장이 뭐길래

1표를 받던 아이

나는 초중고 시절 딱히 존재감이 강한 아이는 아니었다. 타고나길 내향형에 부모님도 별거 중이라 당시 내 맘 속은 알 수 없는 슬픔으로 가득 찬 상태였기 때문인데, 마침 키도 작아서 키 번호 순서대로 교실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타입이었다.


문제는 회사에선 세일즈 담당자로 사람들 앞에 나서길 즐겨하고 나름 나를 활동적이게 북돋겠다고 맘먹은 엄마와의 성격 차이였다. 엄마는 곧 죽어도 신학기 시즌마다 나보고 반장 선거에 출마하라고 등을 떠밀었다.

그런데 그게 잘 될 리가 없었다. 그나마 나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키가 작아 귀엽다고 말해주는 친구도 있었지만, 기가 약한 나를 무시하거나 쉽게 툭툭 치는 아이들도 있었던 걸로 기억한다. 처음 반장 선거에 마지못해 출마한 초등학생 때 나는 1표를 받았다. 내 짝꿍이 던져준 표였다.


그런데도 엄마는 포기를 몰랐다. 그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엄마는 나에게 반장 선거에 나가라고 했다. 당시 엄마의 요청은 반장 선거에 해마다 나가라, 글씨체를 큼직하게 써라, 수업 시간에 선생님 말씀을 열심히 들어라였다. 지금 돌이켜 보면 엄마는 쭈뼛쭈뼛 숫기 없는 나를 늘 그렇게 응원하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당시엔 나로서는 좀 괴롭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들어갈 때쯤엔 난 이미 모든 것에 초연한 상태였다. 또 1표의 수모를 겪어야 하는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중학교 1학년 반장 선거에 출마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내가 학급 투표로 반장이 된 것이다. MBTI 내향형인 나, INFP 반장의 탄생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특이한 기억이다. 건너편 자리에 앉았던 친절한 친구가 나를 뽑은 이유로 “청소 시간에 열심히 솔선수범해서”라고 언급해 주어서 내가 반장이 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나의 장점이라면 나름 관심 가진 것에 몰입하는 시간을 좋아하는 편이다. 그때도 교실 청소에 나도 모르게 진지하게 빠져들고 있었으리라. 어쨌든 좋게 봐준 친구들 덕에 반장이 되었고 그다음 학기에도 반장, 그다음 학기에도 부반장을 하게 됐다. 엄마는 당연히 뛸 듯이 기뻐했다.


신기한 반전이었지만 반장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이번엔 담임 선생님의 다채로운 요청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은 반에서 7등인 나의 성적을 지적하셨다. 반 아이들 앞에서 학급 임원의 권위를 가지려면 논란의 여지없는 1등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담임 선생님은 나에게 성적을 더 향상해서 1등을 하고, 학급 아이들을 잘 살피라고 하셨다. 나는 어쩐지 선생님의 “앞잡이”가 된 것 같은 묘한 기분으로 말썽이 잦은 몇몇 아이들을 열심히 살폈다. 그 경험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다. 학급 공지 같은 걸 할 때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 반 아이들도 있었다. 심지어 “잘난 척 그만하라”는 쪽지를 적어서 보내는 정체 모를 동급생도 있었다. 요즘으로 치면 악플러 같은 존재다(난 얼마나 분했던지 그때 심증을 느꼈던 같은 반 아이의 이름을 여태 기억한다).


그렇게 몇몇 나보다 키가 훌쩍 크고 거침없는 성격의 아이들 앞에서 힘이 부치는 듯한 기분이 되기도 했다. 공부에도 흥미가 줄어들었다. 어떤 날은 잠들면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도 엄마에게는 자초지종을 말할 수 없었다.


그때 내게 리더의 요령이 부족해서였겠지만, 나는 문예반에서 시를 써보거나 가정 시간에 코바늘 뜨기에 열중하는 시간이 아이들 앞에 나서는 것보다 편안했다. 성적은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고등학교에 가서는 반장 같은 학급 임원과는 거리가 있는 교실 캐릭터가 됐다. 열심히 공부한 과목은 점수가 나오는 편이었지만, 관심 두지 않는 과목은 주관식에서 처참한 점수를 받기도 했다.


그런데 엄마는 지금도 내가 그때 이야기를 꺼내면 “그래도 네가 반장도 해보고 좋았던 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는 “그때 엄마가 억지로 반장 하라고 떠밀어서 꽤나 힘들었어”라고 말한다. 그렇다, 사실 엄마와 나는 성격이 잘 맞는 편은 아니다. 각자 개성도 첨예하게 다르다고 봐야겠다. 학부모 강의 시간에 엄마가 어머니 교사로 강의를 와서 열심히 열강을 펼쳐도 나는 줄곧 엄마가 창피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전업주부 엄마를 가진 단짝 친구는 워킹맘 엄마가 있는 내가 부럽다고 했지만, 나는 집에서 살림을 도맡고 퀼팅 바느질 취미를 가지신 엄마를 둔 친구가 부러운 입장이었다.


엄마와 내가 과거에 대한 해석이 다르고 의견이 엇갈릴 때, 나는 지지 않고 내 주장을 펼치고 나름 억울했던 어린 시절을 토로한다. 대체로 엄마는 수긍하는 법이 없다. 그래도 우리는 평행선인 서로의 의견을 툭툭 던지고 또 아무렇지 않게 함께 딴 얘기로 넘어간다. 그게 각자 중년과 노년이 된 우리가 찾은 화해와 공존 방식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 모녀 심리학적으로 건강한 상태인지 나는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이제와서는 몸집이 작고 말수도 없던 나를 보며 해마다 “할 수 있으니 도전해 봐”라고 말을 건넸던 엄마의 마음과 의도에 빙의해 볼 뿐이다. 온라인에서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제안하는 쇼츠 같은 걸 보면, “우리 엄마가 나를 사랑해 줬듯 나 자신을 대접하라”라고 말하는 내용이 잘 나온다. 사회생활 같은 걸 하다 보면 내가 나를 사랑 못하는 날도 자주 오는데 말이다. 그래서 유난히 내 맘이 힘이 드는 날에는, 기억에 자리한 엄마의 응원들을 마음속 핀셋으로 하나하나 수집해서 펼쳐보며 내 마음을 안아보곤 한다.




작가의 이전글사랑을 닮은 것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