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재수생: 엄마한테서 도망쳤다

여학생 전용 기숙학원

19살의 나는 꿈이 많았다. 대학에 가면 문예창작과나 국문과에 가고 싶었다. 혼자 노트에 이렇게 저렇게 끄적이는 시간이 좋았다. 가끔 백일장 상도 받았고, 친구들이 반성문을 쓸 때 나한테 봐 달라고 들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오지만, 같은 고등학생끼리 “너는 뭘 잘못했니? 이걸 잘못했으니까 이렇게 써보자” 하는 식이다.


좋은 대학에 가고 싶었다. 내 능력에서 갈 수 있는 최대한의 좋은 대학. 나에게 그 기준은 “서울에 있는 대학”이었다. 집이 서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다면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다.


문제는 내 능력으로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갈 수 없었던 고3 수능 시험 뒤의 현실이었다. 수능을 보고 내신 점수까지 보태어 이렇게 저렇게 셈하고 나니 수도권 대학도 아슬아슬했다. "물수능"으로 누구나 점수가 오른 해의 시험이었다. 평소 실력보다 높은 점수를 받았다고 믿었던 것이 착각이었다. 나는 컴퓨터 앞에서 새벽까지 점수 배치표를 들여다보며 나의 최선을 담은 지원 학교를 추렸다. 그리고 다 떨어지면 재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엄마는 내 의견에 동의하지 않았다. 엄마는 무조건 하향지원을 해서라도 붙는 곳에 다니라고 했다. 재수는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기약 없는 재수로 비용과 시간을 쓰는 게 엄마 눈엔 탐탁지 않았던 것 같다.


엄마는 결국 나 몰래 극단적으로 하향 지원이라고 할 만한 원서 하나를 써서 접수를 하고 왔다. 내가 생각했던 K 모 학교에 제출하겠다는 말로 나를 속인 것이다. 나는 항의하고 떼쓰고 논리도 내세워봤지만 엄마를 이길 수가 없는 처지였다. 그리고 그 학교가 나의 유일한 합격처가 되었다.


그때 엄마를 향한 나의 반격이 시작됐다. 재수를 하고 싶다고 노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 손에 이끌려 합격한 학교를 찾아가 캠퍼스를 둘러봤지만 내 마음은 요지부동이었다. 내 고집이 엄마 고집보다 세다는 것을 확인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엄마와 나의 대치 상태가 이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게도, 나의 같은 반 친한 친구의 어머니께서 내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내가 재수학원 첫 달 등록비를 빌려줄 테니 우선 등록을 하고 나중에 엄마께 말씀드려 갚아보라”라고. 구세주 같은 분이 등장한 것이다. 마치 게임 속 주인공 캐릭터 옆에 갑자기 나타나 슈퍼파워를 부여하는 착한 요정처럼 말이다.


나는 겁도 없이 그 제안을 덥석 받아들였다. 당시 택시비 기본요금이 2000원이었던가, 떡볶이 1인분이 1000원 2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난 단짝 친구가 재수학원을 등록하러 갈 때 쫄랑쫄랑 따라가서 빌린 돈 70만 원으로 수업에 등록하고, 다음 날부터 누가 뭐라건 학원에 나가기 시작했다. 어설프게 도시락을 싸기도 하고, 이른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어찌 보면 뒷일은 나 몰라라 사고를 친 것이나 다름없는데, 결국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속설을 확인하게 됐다. 엄마는 나를 나무라다가 어쩔 수 없이 70만 원을 갚아주며 재수를 허락해 주었다.


당연히 이후 우리 사이는 별로 좋지 않았다. 집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한량 같은 모습을 보이면 엄마는 속이 끓는 듯했다. 엄마와 볼멘소리를 주고받는 경우가 잦아졌다. 그런데 재수란 게 그렇지 않은가. 어떨 땐 내가 나에게 하는 희망고문 같은 것이기도 하고, 기약이 없는 듯한 막막한 느낌도 들고. 그러면서도 책상에 제대로 앉기란 한없이 힘이 든.


나는 엄마랑 지지고 볶고 싸우는 것이 지겹던 찰나, 우연히 우체통에 들어 있는 여학생 전용 재수 기숙학원 광고지를 보게 됐다. 그리고 ‘나를 여기 보내 달라’고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가차 없는 엄마는 나를 데리고 처음으로 기숙학원을 살펴보러 간 날 그 자리에서 나를 입소시켰다. 짐은 나중에 부쳐줄게,라는 말을 남긴 채 말이다(나중에 엄마는 트렁크에 잠옷과 육포를 넣어 부쳐주었다). 깜깜한 저녁 어두워진 학원 복도에 덜렁 몸만 던져진 그날, 내가 쓸 책상 하나와 가져온 필통 하나가 덩그러니 복도에 놓여 있던 장면이 지금도 기억난다.


기숙학원에 가게 된 건 집을 처음으로 떠나보는 경험이었다. 요즘은 환경이 어떤지 모르겠지만, 당시 재수 기숙학원은 그렇게 럭셔리한 환경은 아니었다. 큰 방에 스무 명 남짓의 한 학급 학생들이 모두 함께 잘 수 있도록 철제 이층 침대가 여러 개 갖춰진 모습이었다. 우리끼리는 군대 내무반 같다고 이야기했다. 학원에서는 저렴해 보이는 폴리에스터 소재 트레이닝복을 나눠줘서 그걸 입고 공부했다. 아침이 되면 담임 선생님이 모든 학생을 방 밖으로 내보내고, 모든 교시 수업과 구내식당 식사, 야간 자율 학습이 끝나서야 방에 돌아와 침대에 등을 대어 볼 수 있었으니, 19살에게는 조금 고단한 매일이었다.


자려고 불을 끄고 누우면 누군가 집에 가고 싶다고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고, 학생들의 빨래는 다 모아서 한꺼번에 했기 때문에 어느 새부터인가는 아이들의 속옷이 서로 섞여서 이게 내 팬티인지 니 팬티인지 모를 어이없는 상황이 생기기도 했다. 외출은 정해진 날짜가 아니면 금지로 주로 실내에서 수업만 하는데, 건물 안에는 햇빛이 별로 없어서 주기적으로 하는 소방 훈련으로 야외에 나가면 눈이 부셔올 정도였다.


당시의 경험으로 내가 얻은 교훈은 "집 떠나면 고생이다"도 있겠지만, 엄마랑 서로 너무 사이가 나쁠 땐 좀 떨어져 있는 것도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기숙학원 생활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내 앞에 할 일에만 집중하기 좋았다. 그리고 자식 이기는 부모님은 없고, 궁하면 구할 길이 있었다. 그다음 해 다행히 나는 서울에 있는 한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고, 70만 원을 빌린 것은 결과적으로는 잘한 일이 되었다. 엄마와의 사이도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고 잘 봉합된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는 당시 엄마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어느 날 엄마 친구분이 이런 얘기를 하시는 거다. “그때 너네 엄마가 너 보고 싶다고 맨날 울면서 기숙학원 앞에 찾아갔었다”라고.


아마도 정해진 외출 날짜가 아니라서 나를 찾아왔다가 학원 측에 면회를 거절당했던 모양이다. 내가 보고 싶어서 엄마가 울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는데, 그랬다고 한다. 어린 자식으로서 엄마가 마음에 품은 사랑을 가늠하기란 어려웠던 것 같다. 나는 딱히 엄마가 보고 싶어서 운 적은 없었고, 거기 재수생으로 와 있는 게 좀 쓸쓸하고 처량해서 운 적은 있었던 것 같다.


이후 나는 엄마와 심하게 다투면 자리를 피한다. 한 번은 나도 화를 주체할 수 없어서 집을 나가 정처 없이 걷다가 종로에 있는 백패커들을 위한 호스텔에 가서 잔 적도 있다. 과자랑 책 한 권 든 비닐봉지 하나 들고 가서 하룻밤을 보냈다. 아침이 되어 체크아웃하는 나에게 카운터 직원이 “어디서 오셨어요?”라고 친절하게 물었는데, 어색하게 웃으면서 “서울이요”라고 대답하고 또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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