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식탁을 찾아서_말씀과 성찬, 그 완전한 포옹

왜 주일 성찬식을 하지 않는가?

by JayGee JIN

bread-72103_1280.jpg 사진 / Pixabay


주일 오전, 교회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은 성경책갈피마다 내려앉아 은혜의 단어들을 비춘다.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목사님의 설교는 때로는 우레와 같고 때로는 시냇물 같아 우리의 메마른 귀를 적신다. 우리는 그 ‘말씀의 홍수’ 속에서 위로를 얻고, 다시금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러나 문득, 예배당 문을 나서며 허전함을 느낄 때가 있다. 귀는 즐거웠고 지성은 충만해졌으나, 정작 내 영혼의 입술은 무언가에 닿지 못한 채 공허하다는 느낌.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예배의 절반만 드리고 돌아선 탓이지 않을까 싶다.


본래 초대교회로부터 이어온 예배의 원형은 마치 두 날개를 가진 새와 같았다. 한쪽 날개는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를 듣는 ‘말씀 예식’이었고, 다른 한쪽 날개는 빵을 떼고 와인 잔을 나누는 ‘성찬 예식’이었다.


개신교 예배학의 전통에서도 예배는 언제나 ‘말씀과 성례(Word and Sacrament)’가 함께할 때 온전해진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의 주일 풍경은 어떠한가. 우리는 거대한 ‘말씀의 날개’를 가진 반면, ‘성찬의 날개’는 퇴화하여 옛 기관차의 추억처럼 되어버렸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이 식탁은 인간이 고안해 낸 종교적 퍼포먼스가 아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거룩한 명령이다. 성경은 그 엄숙했던 다락방의 밤을 이렇게 기록한다.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누가복음 22장 19절)


주님께서는 당신의 살과 피를 내어주시며, 단순히 기억만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이것을 행하여(Do this)”라고 명확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닌,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교회가 지켜야 할 지상 명령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편의와 효율이라는 명분 아래, 주님이 차려주신 밥상을 일 년에 고작 두어 번, 행사 치르듯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종교개혁의 거두 장 칼빈(Jean Calvin) 역시 이러한 불균형을 통탄해 마지않았다. 그는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제4권 17장 43항에서 성찬의 빈도에 대해 명확하고도 열정적인 어조로 기술했다.


“주님의 식탁은 우리가 자주 제정신을 차리고, 믿음을 새롭게 하며, 감사를 드리며,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하도록 하기 위해 우리 앞에 차려져야 한다.... 적어도 매 주일 성찬을 거행하는 것이 교회의 질서에 합당하다.”


칼빈에게 있어 성찬은 설교의 부록이 아니었다. 말씀이 귀로 먹는 양식이라면, 성찬은 눈으로 보고 입으로 맛보며 온몸으로 체험하는 ‘보이는 말씀(Visible Word)’이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수많은 말들의 공해 속에 살고 있다. 논리와 이성, 화려한 언변만으로는 지친 영혼 깊숙한 곳을 어루만지는 데 한계가 있다. 설교가 우리의 ‘지성’을 깨우는 시간이라면, 성찬은 우리의 ‘감각’과 ‘존재’를 깨우는 시간이다.


빵의 투박한 질감을 손끝으로 느끼고, 포도주의 쌉싸름한 향기를 맡으며 목구멍으로 넘길 때, 2천 년 전 골고다의 사건은 관념이 아닌 ‘실체’가 되어 내 안에서 살아 숨 쉰다.


낭만적으로 들릴지 모르겠으나, 예배는 하나님과 인간이 나누는 가장 뜨거운 사랑의 밀어(密語)이자 잔치다. 사랑하는 연인을 만나서 온종일 대화(말씀)만 나누고, 함께 밥(성찬)을 먹지 않은 채 헤어진다면 그 만남은 얼마나 서글픈가. 밥상 없는 잔치가 없듯이, 성찬 없는 예배는 완성되지 않은 교향곡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이제 강단에서 선포되는 말씀의 권위만큼이나, 성찬상 위에 놓인 빵과 포도주의 신비를 회복해야 한다. “나를 기념하라” 하신 주님의 애절한 초대를 외면하지 말자.


매 주일, 말씀으로 뜨거워진 가슴을 안고 성찬의 식탁으로 나아가, 그리스도의 생명을 먹고 마시는 그 ‘거룩한 스킨십’이 필요하다. 그때 비로소 예배는 종교적 의무를 넘어, 영혼을 뒤흔드는 전율이 될 것이다.


말씀과 성찬, 이 아름다운 두 날개가 다시 힘차게 펄럭이는 주일. 그 거룩하고 풍성한 식탁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것은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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