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때가 되면 오고 갈 때가 되면 가기 마련
읽긴 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 책들이 있다. 오래돼 그런 건지 뭘 모를 때 읽어서 그런 건지 확실치 않지만 읽은 건 분명한 데 뭘 읽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긴 명절연휴 동안 읽을만한 책을 찾고 있었다. 기왕이면 얄팍하고 가벼운 책이었으면 했는데 마침 책장에서 <연금술사>가 눈에 띄었다. 여태 두껍고 표지가 화려한 책들 사이에 끼여 있는 듯 없는 듯 꽂혀있었구나. 책을 펼쳐보니 군데군데 연필로 밑줄 그은 문장이 꽤 많았다.
냅다 꺼내 얇으니까 금방 읽겠다 싶어 책상에 내려놓고 읽어 내려갔다. 웬걸. 쉽고 간결한 문장인 건 맞는데 신나게 달리다 갑자기 빨간 불이 켜진 것같이 읽다가 멈춤을 여러 번 하게 만든다. 후딱 읽어버리려고 했던 내 생각이 짧았다. 책이 나를 그렇게 하게 내버려 두지 않았다. 세상에, 이런 책이었어, 여기 문장은 하나도 버릴 게 없네. 연필로 밑줄 그어놓은 게 지금 내 마음에도 와닿긴 하는데, 어쩜 이렇게 낯선 거야. 도대체 뭘 읽은 거냐고.
문장과 문장을 이어 전체 흐름을 따라 스토리를 이해해야 책을 '통'으로 알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읽어야 읽었다고 할 수 있는 거구나, 싶었다. 이번 경험으로.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놓치지 않고 따라가야 전체가 보이는 것 같다.
그리고 처음인 듯 생소했고 인상적인 단어는 마크툽이다. 마크툽에 대해 옮긴이가 토를 달아놓았다. "대개 종교적인 의미로 쓰이는 아랍어로 '그건 내가 하는 말이 아니라 이미 씌어있는 말이다'라는 의미.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다'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연금술사 p.100) 아마 이미 정해놓은 신의 뜻을 거역할 수 없다는 의미겠지만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는 순전히 우리 쪽 문제다. 계절이 오고 가고 낮과 밤이 바뀌는 것처럼, 사람도 생로병사의 운명이 정해져 있지만 그 안에는 무수한 변수와 다양한 일들이 들어차 있지 않던가. 단 하나도 같은 인생이 없이. 다 거기서 거기 같아도 속을 들여다보면 저마다 주어진 삶을 각자 나름대로 꾸려 각양각색 알록달록하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라고 해도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우리는 체념하기 이르다. 그렇다고 맞서 싸울 일도 아니란 생각이 든다.
문득 어느 스님이 내게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세상 모든 것은 왔다가 가는 것이고 저마다 자기의 때를 알아서 오고 가는 것이라고 했다. 인연 따라 나타났다 사라지는데 안달복달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말이다. 그것이 흔히 말하는 내려놓음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도가 없으니 너무 애쓰리 말라고 했다.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은 그렇게 되게 되어있으니, 마크툽.
<연금술사>가 한 문장도 놓치고 싶지 않은 책이었다니. 그 문장들을 내 손으로 차곡차곡 쌓아 담아두고 싶다. 도통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속이 시끄러울 때 할 일이 생겼다, 그건 필사. 일단 책장이 아닌 눈에 잘 띄는 책상 위 한편에 올려놓았다. 인생책 한 권 추가,라고 외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