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마실

공연이라고 하면 무조건 오케이

by 맘달

그 시간 우리는 잠실종합운동장 내 빅탑에 앉아있어야 했다. 하지만 객석이 아닌 잠실 석촌호수가 벤치에 앉아 밤공기를 쐬고 있다.


"공연티켓 생겼어요, 같이 가실래요." 티켓 사진과 함께 정이가 나를 호출했다. 내가 밤마실 다니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안될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는데, 나를 모르고 하는 소리. 나는 공연이라고 하면 만사 제쳐놓고 달려 나가는 사람이다. 공연이라면 '무조건'오케이.


나는 즉답했고 정이는 먹을 데가 많은 잠실새내에서 만나 저녁부터 먹자고 했다. 서커스가 펼쳐지는 멋진 공연에 초대받았으니 저녁은 내가 사기로 했다. "배불리 먹었으니 배도 꺼칠 겸 슬슬 걸어가 볼까" 하니 그러자고 했다. 그 순간, "이걸 어떡해요. 출근할 때 이 가방으로 바꿨는데 전에 들고 다니던 가방에 티켓이 들어있는 걸 안 빼고....." 정이가 공연 간다고 바꿔 멘 작은 크로스백 안에 티켓은 없었다.


정이가 어쩔 줄을 몰라했다, 여기저기 전화를 해봤지만 구제방법을 찾을 수 없었다. 티켓을 넘겨준 사람이 사정이 생겼다고 하면서 비싼 티켓을 흔쾌히 선물한 거였다는데, 그 사람한테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 저녁밥을 산 나에 대한 미안함. 야무져서 좀처럼 실수하지 않는데 이게 웬일인가 싶은 자신의 실수에 대한 민망함. 이런 정이 앞에서 나의 아쉬움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블로그 여기저기에 올라온 공연후기를 보고 정말 굉장하겠다는 기대를 한 건 사실이지만. 얼마나 볼거리가 많을지 눈꺼풀이 내려앉을 겨를이 없을 거라고 장담했지만.


이럴 땐 바로 인정, 포기가 빠를수록 좋다. 대신 나는 석촌호수 가보자고, 여태 가본 적 없다고 했다. 애들 어렸을 때는 롯데월드에서 놀다 지쳐 집에 가기 바빴고 어쩌다 롯데콘서트홀 공연 보러 와도 지하와 지상건물 사이를 오갔을 뿐이라서. 사람 많고 복잡해서 정신없는 곳으로만 여겨져 기피해 온 것이라서. 자연스럽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 옛날 습지와 논밭이 많았고 나루터가 있던 교통의 요지였다는 게 상상이 가지 않는 곳이다. 우뚝 솟은 건물들이 뿜어내는 불빛으로 사방이 반짝반짝, 휘황찬란했다. 우리는 롯데타워가 보이는 맞은편 호숫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물과 나무가 없다면 삭막했겠지만 다행히 물과 나무가 있고 그 주위로 가벼운 차림의 사람들이 걸어 다녀서 동네 마실 나온 것 같은 착각마저 들었다. 가만히 앉아있으려니 좀 썰렁했다. 정이가 따끈한 커피를 사 오겠다고 자리를 뜬 다음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좀 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둘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몰랐는데 사람들이 걷는 길과 벤치가 바투 있어서 여러 번 눈앞에 왔다가 사라지는 얼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어보지 않아 몇 바퀴째인지는 모르지만 계속 호수 주위를 걷거나 뛰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빌딩 조명을 받고 야외무대에서 걷고 뛰고 가벼운 동작의 춤을 추는 것처럼 보였다. 나무벤치가 객석이라 나는 거기에 앉아 관람 중인 거고. 호수에 비친 불빛조명의 출렁임, 바람에 출렁대는 나무들의 백댄스, 저마다 다른 복장과 움직임으로 펼쳐지는 퍼포먼스, 무대는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삶을 그려내고 있었다.


정이가 따끈한 커피를 들고 돌아왔다. 나의 짧은 공연관람은 끝나고 우리들의 긴 이야기는 다시 시작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