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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맘디터 Aug 28. 2024

BGM 제니(JENNIE) You&Me

오늘의 도보완주를 해내고 시원한 물에 샤워를 했다. 하루에 22킬로미터를 걷는 강행군에 다리는 나무기둥보다 딱딱해지고, 발의 피부는 허물을 벗듯이 계속 사라지고 있다.

샤워를 하니 물집이 터진 자리에서 고름이 핑크스럽게 흘러나온다.

머리에 물줄기를 뿌리며 시원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만, 마음속으로 오늘만큼은 전화를 걸자고 다짐한다.

온 의식이 저 멀리 서울로 흘러가는 것을 느꼈다. 이 일과를 마치고 전화를 해야 하나, 술 한잔 마시고 전화할까 한참을 고민한다. 지금 나의 여행이 끝나면 반드시 그에게 이별을 건네야 한다. 

아니 우리는 이미 끝난 관계. 왜 굳이 언어적인 정리가 필요한 건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그가 나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않고 같은 대학원에 다니는 여자를 사귀고 있다는 걸 이미 눈치채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런 감정이 일지 않았다. 다만 내가 항상 고민해 온 그 한 문장.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걸까?" 

이 문장에 대한 답이 내려졌고, 지금부터 나는 그가 아닌 나에게 화가 난다.

나는 왜 이별을 고하지 않았을까. 


어느 날, 남자는 나에게 왜 냉담하냐고 물었고, 나는 그에게 영원히 입을 닫았다. 내가 마음속에 내린 결론은 이렇다. "나는 너에게 사랑을 못 느끼는 병에 걸렸거든."

아무튼 네가 나와 정리하지 않고 그 여자를 만난 건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아서 아무런 문제가 없지만, 그 여자와 너는 사랑하고 있으니 우리의 관계는 오토매틱으로 끝이라고 말을 할 생각이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샤워를 하고 나왔더니 맑은 밤하늘에 소나기가 내린다. 발이 아파서 신발을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 나왔다. 거센 비 너머에 달이 비치는 이상한 밤이다. 비와 달이 한 장면에 공존할 수 있는 건가?


"언니, 발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 약도 있어."


옆에 서 있는 남자는 나의 발을 가만히 바라본다. 한국사람인 건가, 동남아 사람인건지 알 수가 없다. 저 얼굴을 어디에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흔한 인상인가 싶다.

셋이 나란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소나기가 그치고 달이 빛을 낸다. 양 옆에 추측건대 한국사람이 있고, 가녀린 초승달을 바라보고 있으니 내가 외국에 있다는 느낌조차 없다. 한국말을 알아듣는 누군가를 여행에서 만난 것도 그리 즐겁지는 않다. 여행의 피곤함을 날리는 술파티와 사람파티. 보드카를 마시자는 두 사람에게, 옷을 갈아입고 합류하겠다고 말하며 일어선다. 숙소로 돌아와 꾸물거리다가 마당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조용히 다시 낡은 벤치로 돌아온다.


낯선 나무와 풀에서 올라오는 이상한 향기. 눈을 감고 나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나의 숨소리는 늘 나를 편안하게 한다. 내가 살아있다는 실감이 나는 왜 기쁜 걸까. 나는 마음속에서 매 순간 존재하지도 않는 저 먼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걸까.

한참뒤에 눈을 떠보니 아까 본 그 남자가 서 있다.


"네?" 나도 모르게 질문했다.

남자도 얼떨결에 대답한다.

"네?"

한국사람이 맞나 보다. 우리의 이상한 외계어의 대화에 웃음이 나왔다. 


둘이 가만히 앉아서 하늘을 바라본다. 하고 싶은 말도 없고, 듣고 싶은 말도 없는 이 침묵.

침묵이 편안한 이유는 시간의 현에서 벗어난 듯한 해방감 때문인 듯하다. 

내가 사랑하는 이 침묵을 그 나쁜 놈은 냉담이라고 표현한 걸까?

잠시 후에 벌레가 몸을 타고 오르는 듯한 이상한 느낌에 벌떡 일어났는데 바지가 낡은 의자 모서리에 끼어서 옆구리 부분이 벗겨져 버렸다. 한숨을 쉬며 옷을 올리는데, 남자는 나와 하늘의 달을 번갈아가며 바라보다가 어딘가에서 묵직한 돌을 주워온다. 그러더니 갑자기 의자 모서리에 튀어나온 못을 망치질한다.


저 얼굴이 어느 나라 사람인지 중요한 게 아니라, 돌을 들고 있는 모습이 고대 사냥꾼 같아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시대를 초월한 사람인 건가?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저 사람은 이 숙소에 머물고 있는 한국귀신이 아닐까? 별 잡생각이 다 든다.


그렇게 밤이 흐르고, 새벽 동이 터오는 시간. 밤새 나와 같이 숙면을 취한 듯한 도마뱀을 방 밖으로 던지고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건물 하나 없는 평지에 햇살이 온통 떨어진다. 눈 부셔서 인상을 찌푸렸다. 애써 빛을 등지고 걸어가는데, 어젯밤 달빛을 잔뜩 머금은 남자가 이 아침에는 햇살 가득 떨어지는 커피를 마시고 있다.

남자가 들고 있는 커피잔 안으로 바스러지는 아침 햇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남자는 가만히 있다가 고개를 숙이고 여자가 바라보는 커피잔으로 쏟아지는 햇살을 같이 바라본다.


나는 깨닫는다.

'당신을 사랑하는 병에 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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