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영화 <아노라>, 인도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뭄바이 사람들은 자신의 착각을 진짜라고 믿어. 그래야 미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으니까."
- 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 대사 중에서
며칠 간격으로 영화 두 편을 보았습니다. 영화관에 가서 어떤 영화를 볼까 고민하다가,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은 대학로에서 보았고, <아노라>는 집에서 보았습니다. 영화관에서 보아도, 집에서 보아도 두 편 모두 눈을 뗄 수 없이 마음 한쪽을 불편하게 만드는 작품들입니다.
뭄바이에 사는 여성 3명은 고된 현실 속에서 자신의 착각을 희망으로 삼아 열심히 살아갑니다.
분명 내가 수십 년간 살아온 낡은 집인데, 정당하게 거주했다는 법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없어서 땅 주인에게 보상 한 푼 못 받고 쫓겨날 처지에 놓입니다. 그래도 분명 이곳은 내 집이고, 내가 계속 붙잡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나를 버리고 독일로 떠난 남편이 아직도 나를 잊지 않고, 내 주위를 맴돌고 있을 것 같은 착각.
이슬람교도와 사귀는 게 부끄러워서 거짓말이 늘어나고 그를 계속 감추면서도, 내가 그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고, 우리는 많은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착각.
뭄바이 여성 세 명의 착각을 따라가다 보면, 현실과 착각의 모호한 경계에 대해서 고민하게 됩니다. 수십 년 간 살던 집에서 비참하게 쫓겨났지만 막상 고향에 돌아와 보니, 내가 누울 만한 따뜻한 방이 있습니다.
바다에 빠져 간신히 살아난 생면부지의 남성을 간호하다 보니, 독일로 도망친 남편이 많은 고투 끝에 눈물을 흘리며 내게 돌아온 것 같은 또 다른 착각이 듭니다.
이슬람교도인 애인을 숲에 숨겨놓고 밀애를 나누지만, 둘이 동굴이라는 미지의 공간에 들어서서 사람들의 흔적을 짚어보며, 오래된 기호와 흔적 앞에서 두 사람의 비현실적인 사랑이 무척 현실적으로 보이는 착각을 만듭니다.
영화 <아노라>의 착각은 더 나아갑니다. 며칠 동안 술과 마약에 취한 재벌 3세 반야와 매춘부 아노라가 연애를 하고, 두 사람은 혼인 신고를 합니다. 이 혼인에 대해 진지한 아노라. 그녀에게 혼인서약은 분명한 사실이며, 그 사실은 두 사람의 진심을 담고 있는 진실이고, 그 진실이 자신을 지켜줄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아노라의 착각은 그것을 둘러싼 날카로운 현실에 부딪치면서 산산조각 납니다. 재벌 3세 반야의 가족이 보낸 하수인들이 둘의 혼인신고를 무효화하기 위해, 도망친 반야를 찾아내려고 고군분투하는데, 그 과정이 너무 배고프고 졸렵고 머리가 띵 하면서도 처절합니다. 평범한 하수인들이 요란법석을 떨며 자신의 혼인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뛰어다닐수록 아노라는 자신이 한 줄기 희망으로 삼고 있는 사랑과 결혼이라는 착각이 점점 흐릿해지는 걸 느낍니다. 아노라의 착각이 깨지는 가장 큰 사건은 바로 하수인 중 한 명인 이고르가 자신을 강간하려고 했다고 말하는 순간입니다. 이고르는 말합니다.
"내가 왜 너를 강간해?"
"너는 나를 강간하고 싶으니까."
"나는 강간하는 사람이 아닌데, 내가 왜 너를 강간해?"
이고르의 담담한 대사는 아노라 자신에 대한 착각이 타인에 대한 왜곡과 착각까지 만들어 냈다는 걸 알려줍니다. 아노라는 반야와 자신의 결혼을 진짜라고 믿는 것 같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 자신이 어느 누구에게나 강간당할 수 있는 쉬운 존재라고 느꼈던 것 같습니다. 반야와의 결혼과 사랑도, 이고르가 자신을 탐하고 있다는 느낌도 모두 착각입니다. 반야의 미약하고 일시적이고 우연한 한 줄기 사랑을 큰 빛으로 착각한 자신. 늘 누군가 나를 욕망하고 있다는 착각. 아노라의 모든 착각이 24시간 동안의 난리법석으로 깨지는 영화가 바로 <아노라>입니다.
두 편의 영화를 보면서 착각이 보내는 희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또한 착각을 부수고 싶어 하는 현실의 냉혹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착각의 동굴을 만들고, 그 동굴 안에서 따뜻함과 사랑, 희망을 느끼며 삶을 사랑하게 될 것 같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착각, 네가 변했다는 착각, 내가 곧 행복해질 거라는 착각, 내가 너무 불행하다는 착각, 내가 아프다는 착각, 내가 건강하다는 착각, 삶이 내게 우호적이라는 착각, 삶이 나를 외면한다는 착각.
그 착각이 깨지는 순간이 오더라도, 인도영화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모든 것>의 마지막 장면처럼 누군가와 함께 몽환적인 밤하늘 아래에서 술을 따르며 서로의 착각을 편하게 이야기 나눌 수 있다면, 그 쪽팔린 착각도 분명히 삶의 한 줄기 희망이 되어 현실을 살아가게 만드는 힘이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착각을 부끄러워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우리가 빛이라 상상하는 나와 당신의 그 모든 착각을 그대로 사랑하고 인정하겠습니다.
맘디터의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