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일상의 숨구멍, 양양 설악해변 세번째 솔로차박
격리가 해제되고 맞이한 토요일, 오후 3시까지 낮잠을 잤습니다.
눈을 떴는데 서울 기온은 35도, 에어컨은 하루종일 돌아가고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데 하필이면 <리틀 포레스트>와 <카모메 식당>이 눈에 띕니다.
진초록. 저를 흥분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한여름의 진초록. 여름을 붙잡고 싶은 마음.
인터넷을 검색해서 남편에게 지금 동해는 시원하다고, 차박을 가자고 하니 콧방귀를 뀝니다.
에어컨 앞이 천국이라며 널부러져 있는 남편과 리트리버를 두고, 혼자 간단한 간식을 챙겨서 나홀로 차박을 출발합니다.
여름 중독자여서 그런지 폭우가 내리면 심장이 두근두근 뜁니다. 유리에 쏟아지는 빗방울을 와이퍼로 닦아내는 게 가끔 아까울 때가 있습니다. 다 마셔버리고 싶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며 3시간 좀 넘는 시간이 걸려서 양양 남애리 해수욕장과 지경해변에 도착합니다.
지난 주에 비해 날이 흐려서 바다색은 어둡지만 지금이 휴가철이 맞나 싶을 정도로 조용하고 단정한 모습입니다.
원래 지경해변에서 차박을 하려고 했지만, 진돗개의 귀소본능처럼 설악해변이 자꾸 아른거립니다. 결국 시동을 걸어 30분 거리의 설악해변으로 출발합니다.
차를 적당한 곳에 주차하고, 빠른 걸음으로 해변에 들어갑니다.
"보고 싶었어. 반가워.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
바다를 바라보며 음악을 하염없이 들으니 시간가는 줄 모르겠어요.
설악해변이 왜 좋을까... 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엄마의 젖가슴 같이 흘러내리는 아담하고 아름다운 해안선-바다의 위엄을 포기할 수 없는 동해안 수평선의 묘한 조화. 저 멀리 떨어져 있는 낙산사. 내가 큰 바다 앞에 서 있는 느낌이 아니라, 바다가 내 품에 쏘옥 안기고, 내가 바다를 끌어안는 그런 느낌이 저를 설악해변에 중독시킵니다.
양양이 엄청 시원하다고 남편에게 전화해서 약올리고 싶었지만, 남편은 자기의 천국에 있고, 저는 저의 천국에 있고ㅎㅎ이렇게 각자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있으니 다행입니다~
저녁 9시 조금 넘어서 여행스케치의 '별이 진다네' 노래를 듣다가 잠이 들었는데, 차로 떨어지는 빗소리에 중간 중간 잠이 깹니다.
차박을 좋아하는 이유가 이거예요. 바람이 불면 바람을 맞으면서 자고, 비가 내리면 빗소리를 들으며 자는 게 좋습니다. 콘크리트 두꺼운 우리집 아파트에 감사하지만, 이렇게 자발적으로 차 안에서 맞는 비와 바람은 저를 언어에서 해방시키고 지구의 침묵에 귀를 기울이게 만듭니다.
먹을 것을 따로 챙겨가지 않았는데, 옆에서 차박을 하시는 노부부께서 복숭아를 나누어 주십니다.
두 분께서 계속 티격태격 하시길래 좀 걱정되었는데, 복숭아를 건네 주시는 아주머니의 인자한 미소에 얼마나 안심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새벽 3시 40분에 눈을 떠서 한 시간 동안 차 안에서 빈둥빈둥 굴러 다닙니다. 대형 평수의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지만, 이렇게 비좁은 트렁크 안에서도 충분히 살아낼수 있음을 생각하면, 일상에서 모든 걸 너무 과분하게 누리고 있는 건 아닐까 반성을 해 봅니다.
일출 시간이 다가와서 바다를 향해 걸어갑니다. 많은 가족들이 차 안과 텐트에서 나와 해변 중간 중간에 서 있네요.
흐려서 일출을 못보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아쉽습니다. 차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런데 잠시 후에 비구름 사이로 태양빛이 바다에 흩날립니다.
'그래, 이거면 충분하지~'
비 내리는 바다, 어두운 바다, 흐린 바다, 햇빛이 흩날리는 바다를 보았으니 충분합니다.
어떤 욕심을 더 부리겠습니까ㅎㅎ
3일동안 시댁에서 지낸 아이들을 데리러 가야 해서 5시 40분에 시동을 걸고 서울로 출발합니다.
7시 40분, 집에 무사히 도착합니다.
서울로 돌아올때마다 직진 주행 중에도 사이드 미러를 통해 점점 멀어지는 여행지를 바라보는 저의 버릇이 웃깁니다. 결국 아쉬운 겁니다. 쿨한 척 하지만, 강한 척 하지만, 매 순간이 아쉽고 아깝고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20대 초반에는 저에게 보길도라는 구멍이 있었습니다. 숨고 싶을 때, 쉬고 싶을 때마다 보길도로 떠나서 며칠씩 머물다 오면 온갖 상처에 딱지가 생겨서 더 이상 아프지 않았어요. 심해에서 헤엄치는 범고래가 잠깐 수면 밖으로 나와서 숨쉬는 그 숨구멍. 43년의 세월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아줌마가 되었는데, 억척스러운 아줌마에게도 일상의 중간 중간마다 이 숨구멍이 이렇게 소중합니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자신의 숨구멍으로 한번씩 정말 시원한 숨을 쉬기를 바랍니다.
한여름의 진초록 중독자인 아줌마의 솔로차박 이야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