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산기 (서울 관악구 관악산)
찌는듯한 더위와 습도의 8월이었다. 비록 비말 마스크였지만 집에서 출발해서 귀가까지, 마스크를 단 한 번도 벗지 않은 등반이었다. 스스로가 자랑스럽다. 이 몸이, 그 저질체력이었던 내가, 마스크를 쓰고 혼자 관악산 정상 찍고 왔다. 너무 자랑스러워 이 기쁨도 기록하고 저질체력들 힘내자는 취지로 글 남긴다.
관악산. 비록 높이는 몇 백 미터에 불과한 산이지만 한라산, 백두산, 설악산, 지리산만큼 유명한 산이다. 서울 경기에 걸쳐 접근 루트도 다양하고 서울 2호선 역세권(!)에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주말에 서울대입구 주변에 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얼마나 많은 등산객들이 관악산을 향해 모여드는지. 관악산의 인기는 비단 접근성에만 있지 않다. 일단 산이 잘 생겼다. 관리도 잘 되어 있고. 한마디로 좋은 등산로를 가진 멋진 산이다.
관악산은 좋은 산이지만 쉬운 산은 아니다. 아무나 가면 될 것 같지만 또 아무나 갈 수 있는 산은 아니다. 나도 처음엔 무슨 동네 뒷산인 줄 알고 친구 따라갔다가 눈물을 흘리며 중도 하차할 뻔했다. 중도하차할 수 없었던 이유는 오직 하나. 방법이 없었기 때문. 일단 친구한테 질질 끌려 올라간 다음, 막걸리 기운에 겨우 하산한 기억이 있다. 옛날엔 막걸리 팔았다. 그렇게 하산하고 다음날 온몸이 초토화되어서 앓아누웠지. 저질체력 시절의 일이다. 요즘은 걷기를 많이 해서 중질 체력 정도는 된다. 이제 예전의 체력이 아니니 코로나로 사람도 적은 요즘, 주중에 일찍 들렀다올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에 고생한 공포가 워낙 컸기 때문에 혼자 잘 다녀올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렇게 검색을 거듭한 결과, '등산 초보 추천 코스'라는 게 눈에 들어왔다. 등반 초보자들이 체력소모를 최소화하면서 바로 연주대(정상)까지 갈 수 있는 코스라는 것.
결론부터 얘기하면, 서울대 공대 쪽에서 바로 올라가는 길. 지도 앱에서 "서울대학교건설환경종합연구소"를 치고 그 정류장에서 내리자. 거기가 등산로가 바로 시작되는 곳이다. 놀랍게도,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등산 표지판이 보이는데 연주대가 1.6km가 남았다는 표지판을 곧 만날 수 있다. 버스에서 내렸을 뿐인데 연주대가 고작 1.6km! 등반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한 시간이면 정상이라고 한다. 한 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그 앞에 은근히 주차도 할만한 것 같지만 (주차비 있음) 그래도 학교니까 등산객은 주차는 지양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버스가 여러 대 있다. 관악 02번, 5511, 5513. 생각보다 자주 오는 버스니까 대중교통으로 가자. 서울대학교 입구에서 등반을 시작하면 서울 둘레길과도 겹치는 길을 30분 정도 걷게 되는데, 길은 잘 닦여져 있지만 체력과 시간을 아끼고 싶다면 공대 출발 길을 권한다. 어차피 두 길은 만난다. 정확하게 설명할 순 없다. 나도 평생 관악산은 딱 세 번째 왔는데 매번 다른 길이었고 헤매었다.
전날 비가 많이 내렸다더니 아주 계곡에 물이 콸콸콸. 어찌나 시원하고 좋던지. 아예 등산양말 신고 발 담그는 시민도 종종 보였다. 아주 얼음장처럼 시원했겠지? 나는 체력 떨어질까 봐 긴장하면서 가느라 쉽게 쉬지 못하고 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산을 올랐다. 맑고, 푸르고 아주 끝내주는 날이었다.
각종 걷기 길 위주로 다니던 내게 연이은 오르막은 좀 도전적이었다. 특히 저 데크가 일단 시작되면 영원의 시간이다. 끝나지 않는다. 프로 산악인처럼 생긴 사람들도 한두 번은 쉬어가더라. 고도가 높아지니 사방이 시원하고 좋긴 한데 슬슬 체력소모가 시작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1시간이면 간다지?'라는 헛된 희망을 버리지 못했지. 어리석게도.
와, 산에 왔다 산. 산에 올라왔더니 산에 온 기분을 느낄 수 있다. 내 말 무슨 말인지 알 거다. 그리고 산의 1.6킬로가 무슨 뜻인지 아주 매운맛을 봤지. 와, 안 끝나. 우아한 자세로 걷고 있었는데 슬슬 엉덩이가 엉거주춤 뒤로 빠진다. 하지만 뭐, 할만하다. 마음을 비우다 보면 어느새 계단은 끝난다.
계단을 헥헥대고 오르고 나면 이제 심리적 압박의 장면이 펼쳐진다. 바로 저 돌 언덕. 하지만 나는 이미 검색하다가 정보를 얻었지. 정상 인근에 쉬운 우회길도 있다고 한다! 바로 아래 사진의 표지판. '쉬운 길'이라는 표시가 데크 난간에 붙어있긴 한데 비와 먼지로 글씨가 잘 안 보이는 상태였다. 그냥 저 파란 테두리의 기상관측소 안내 패널이 보이면 그 방향으로 따라가자. 아래 사진의 오른쪽 돌길로 가면 좀 더 어렵고 빠른 길, 아래 표지판 방향으로 가면 쉬운 우회길이다. 두 길의 소요시간은 거의 같다고 한다.
돌길도 도전적이고 좋아 보였지만, 애초에 초보자 코스를 선택한 김에 쉬운 길이라는 곳으로 가기로 했다. 참, 저 갈림길에는 저렇게 잠깐 쉬어갈 만한 곳이 있는데, 고양이들 식사 장소인 모양이다. 주기적으로 오는 캣맘들이 있는 듯 했다. 내가 갔을 때도 어떤 분이 진수성찬을 차리고 있었고, 고양이들이 서너 마리 몰려있었다. 이날 산을 오르면서 캣맘을 3명인가 봤는데, 성별도 연령도 다양했다. 사진의 고양이들 통통하고 몸에 윤기 흐르는 것을 보라. 아주 그냥 영양을 챙긴 고급 식사를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쉬운 길이라길래 그냥 거저 가는 길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여기도 데크와 계단이 잘 되어 있다 뿐이지 다시 오르막이다. 그래도 네 발로 기는 일은 없는 편안한 길이다. 그리고 이제 슬슬 정상이 가까워지는 기분이 난다. 사방에 보이는 게 달라진다. 그래 이 맛에 산을 오는 거지. 아 시원해. 지금 사진 다시 봐도 시원하네.
그리고 이것은. 관악산 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장씩은 찍는다는 바로 그 사진. 대표 인증샷 코스. 인스타에 연주대 검색하면 수천 장 나올 것이다. 이 사진 찍었으면 할 거 다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리가 후들거리지만 마지막, 마지막 힘을 내서 저 돌계단을 오르면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짜잔. 해발 629m! 원래 저기서 인증샷 찍으려면 줄이 길다고 하던데, 내가 간 날은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은 날이라 대기는 없었다. 돌 진짜 잘 생겼다. 네 발로 기어올라가면 저기 사람들 앉아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 돌이 은근히 안 미끄러워서 재미있게 올라갈 서 있다.
기상관측소라고 한다. 나 분명히 십 년 전쯤 여기 왔었는데 처음 보는 기분이다. 하긴, 그때는 거의 울면서 올라와서 눈에 뵈는 게 없었을 것이다. 관측소 옆의 저 돌도 참 근사하지 않은가. 관악산 산세는 어디 가도 빠지지 않는 것 같다. 돌산 중에서도 참 잘생긴 돌산이다.
아 그리고 정상에서 얼음물과 아이스크림, 음료수를 파는 아저씨 한 분이 계셨다. 더웠던 날이라 얼음물 사서 벌컥벌컥 마시니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이 날은 사람이 많지 않아서 뭐든 넉넉해 보였는데 평소에도 늘 살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이제 하산만 남았다. 그런데 주의하자. 하산길이 만만치 않다. 별생각 없이 내려오다 보니 이상한 방향이었다. 나만 그런게 아니라 어리버리한 젊은이들이 다 엉뚱한 데서 "서울대입구 어떻게 가지"하고 술렁이고 있었다. 우리는 이미 과천방향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그대로 갔으면 강제 과천행.
관악산 백번쯤 오른 것처럼 보이는 산악인을 붙잡고, 서울대입구 가고 싶다고 하니 '님 왜 자다가 봉창?' 하는 표정으로 여기 아니라고 해서 상황의 심각성을 인지했다. 나는 길도 아닌 곳을 네발로 기어서 난간 넘어서 제 길을 찾아갔는데 과정은 일단 생략한다. 각종 등산 앱들에게 감사를 보낸다. 요지는 올라갈 때 길 잘 기억했다가 내려올 때 잘 되짚어 오라는 것. 앞사람 따라서 부지런히 가면 경기도 간다.
그리고 귀가 시 주의할 점 추가. 처음에 출발한 정류장은 하차 전용 정류장이다. 집에 갈 때도 공대 쪽으로 내려와서 5511, 5513을 타려면 300m 정도 더 가서 "제2공학관" 앞에서 버스를 타야 한다. 이 설명이 정류장에 바닥에 써붙여져 있는데 나는 그 설명을 보지 않고 손을 열심히 흔들었고, 버스기사님은 무심하게 손을 휘저어 지나가버리시더라. 서러움이 몰려왔지. 왜죠. 왜 날 싫어하죠 기사님. 사람이 땀 흘리고 머리 산발되고 땀냄새도 나는 것 같고 막 초라해지니까 막 피해의식도 생기고 그러는 것 같았다. 하아... 하지만 그건 오해고 친절한 서울버스기사님들은 정확한 정류장이라면 친절하게 태워주신다.
아 그리고 시간. 누구는 한 시간에 갔다지만, 나는 올라갈 때 많이 쉬지도 않았던 것 같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거의 한 시간 반 걸렸다. 물론 날이 더웠고 중간중간 사진도 찍고 SNS도 하고 그랬다만 1.6킬로가 그렇게 멀 줄이야. 내려올 때는 길을 헤매기도 했고 체력 소진 상태여서 또 한 시간 반 걸렸다. 출발 전 정비하고 정상에서 쉬고 여차저차 모든 시간을 합치니 버스 하차 후, 세 시간 반 걸린 것 같다. 이 정도면 정말 완벽한 도심 등산이다.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서 그 정도 시간에 서울 한 번 쫙 내려다보고 오다니. 물론 다음날 몸살 기운으로 퍼져서 잤지만, 이 정도면 나도 할만하다. 재방문 의사 있다. 기회 되면 저질~중질 체력들도 이 루트로 자신 있게(?) 도전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