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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Aug 29. 2016

[책] 도박묵시록 카이지 - 카즈야 편

도박묵시록 카이지 - 카즈야 편(이하 '카즈야 편')이 한국에 소개되었다. 기존에 저작권 문제가 있어서 소개되지 못한 시리즈라더니 해결된 모양이다. 종이책 대신 리디북스나 예스 24 등에서 E북으로 대여 가능하다.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카이지는 1996년에 연재를 시작한 이후 일본에서 천만 부 이상 팔렸으며 인기에 힘입어 애니메이션과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그림체는 호불호가 갈리는데 때로 불쾌할 정도로 추하다. 유치하고 과장되고 극단적인 감정표현이 수시로 나온다. 특히 눈물과 정신이 흘러내리는 묘사는 끈적거리며 늘어진다. 그림체 때문에 못 보겠다는 독자도 있다.

우리는 매번 카이지가 도박에서 승리할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기고 나서 다시 도박을 할 것도 알고 있다. 이 시리즈는 내내 인간의 추악한 면을 전시하다가 그래도 인류에게 한 줌의 희망이 남아있음을 새삼 언급한다. 새삼스럽다.


하지만 그 모든 단점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재미있다. 인간의 본질과 미추에 대한 주제의식을 매번 다른 도박 형식을 빌어 오락적으로 보여준다. 주인공 카이지는 기지가 넘치고 배짱이 좋지만, 영웅은 아니다. 돈에 눈멀어 이성을 잃고 어리석은 선택을 한다. 하지만 카이지는 배신하지 않는다. 카이지의 부족함과 부덕함은 결코 타인을 배신하는 데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배신을 당하더라도 배신의 상처는 트라우마가 되지 않는다. 위대하진 못해도 처참한 본질을 드러내며 바닥까지 가지는 않는다. 그것이 평범한 세계에 살고 있는 독자들이 카이지라는 주인공에 마음 편하게 감정 이입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닐까.


'카즈야 편'


기존 카이지 시리즈를 봐온 사람이라면 알고 있겠지만, 주인공은 끝나지 않는 도박 지옥에서 계속 고통받는다. '카즈야 편'은 카즈야가 주인공인 설정으로, 도박의 주인공이 카이지가 아닌 특이한 시리즈다. 카이지는 '카즈야 편' 10권이 끝나도록 방관자이자 관찰자이다. 실제로 도박을 하고 있는 건 악인 카즈야와 가난한 세 아시아인이다.


카즈야는 제애 그룹 효도 카즈타가의 아들이다. 제애 그룹은 카이지 시리즈의 세계에서 악역을 담당하고 있는 재벌그룹. 제애그룹의 효도가 갱생의 여지가 없는 순수하고 추악한 악 그 자체라면, 그의 아들 카즈야는 인간을 벌레처럼 보는 것에서는 동일하지만 좀 더 인간적이다. 돈 때문에 몰려든 사람들 사이에서 상처받는 기억에 매달려있다 보니 약한 인간들의 추함을 끌어내야 마음의 평화를 얻는다. 흥미로운 것은 이 인물은 소설을 쓴다는 것. 돈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여 지옥도를 그리고 그 실화를 바탕으로 소설을 쓰는 인물이라는 설정이다. 이 성격파탄 부잣집 도련님의 예술혼에는 상상이 아니라 실화가 필요하시다고 한다.


한편, 가난하지만 서로를 돕고 서로를 위해 희생할 생각까지 하는 세 남자가 있다. 궁지에 처했거나 끔찍한 가난을 경험한 세 명이 카즈야의 소설 소재로 걸려들었다. 카즈야는 세 명이 등을 보고 나란히 앉는 의자를 개발해냈고, 관객으로 카이지를 초대한다. 카이지의 역할은 사실상 없다. 독자와 함께 놀라고 안타까워하는 심정을 보여주는 역할이랄까. 실질적 주인공은 덫에 걸린 세 남자다. '카즈야 편'은 이 세 남자가 어떻게 이 상황까지 오게 되었는지에 대한 묘사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배신이 가장 큰 변수가 되어 온 카이지 시리즈답게 이 세 명이 통과해야 하는 시험대는 배신을 위해 설계되어 있다. 세 명 모두 돈과 함께 살아나가거나, 셋 다 돈 없이 목숨만 건지거나, 아니면 한 명만 살아서 돈을 갖고 두 명은 죽거나 하는 결과가 예정되어 있다. 둘이 죽고 혼자 살아남는 경우에 가질 수 있는 돈이 가장 많다. 세 남자는 서로 소통할 수 없다. 아주 큰 음악 소리가 나는 헬멧을 쓰고 서로 등을 보고 앉아서 총 16번의 선택을 해야 한다. 이 16번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가 '카즈야 편' 열 권에 걸쳐 전개된다.


주제의식은 동일하다. "우리는 눈이 뒤집어질 만큼 많은 돈 앞에서 서로를 배신하지 않을 수 있는가?" 상대방이 나를 배신할지도 모른다는 마음속의 작은 균열을 증폭시키는 작은 속삭임의 정체는 무엇일까. 평범하게 성실하게 서로 도우며 살아온 우리의 마음속에도 이미 작은 악 한 조각은 늘 함께해온 게 아닐까. 인간은 과연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이타적일 수 있는가?


카이지 시리즈의 대답은 늘 비슷하다. 인간은 눈앞의 이익에 망가지고 배신하고 이성을 잃는 약하고 형편없는 존재지만 아주 작은 희망은 있다. 때로 그 작은 희망은 모든 것을 걸만한 가치가 있으며 때때로 기적처럼 응답한다. 만화 같은 결말과 만화 같은 교훈이다. 하지만 동시대의 사람이라면 그나마 듣고 싶어 하는 말일 것이다. 인간이 그렇게까지 형편없는 건 아니야, 라는 건.



덧 : '카즈야 편'의 헬멧 디자인은 실로 대단하다. 유치하고 조악하고... 호피무늬 헬멧은 꼭대기에 전구가 달렸고 안테나 같은 것도 튀어나와있다. 내가 저들이었다면 도저히 저런 헬멧은 쓸 수 없으니 이 승부에서 날 빼 달라고 절규했을 것이다. 도박에 패하는 순간, 배신에 슬퍼하기보다 저런 못생긴 헬멧으로 죽어야 한다는 것이 더 비참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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