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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p 03. 2016

[책] 음모론의 시대, 전상진

우리의 고통과 무의미를 무엇에 물을 것인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재미있다는 것이다. 대중서라고 볼 수 없는데도 구석구석 재미있다. 그 다음 미덕은 책이 작고 가볍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두꺼운 양장본만큼의 무게가 있다. 일요일 오전에 나오는 '놀라운 TV 서프라이즈'에 나올 법한 흥미진진한 음모론 이야기는, 없다. 그런데 이 책은 왜 무게 있으면서도 재미있을까. 음모론 자체가 가진 재미와 매력 때문일 것이다.

저자(전상진/서강대 사회학과)는 이 책을 통해 음모론의 역할과 동기를 탐구하며 어떻게 음모론이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했고 왜 인류 역사 전반에 걸친 생명력을 자랑하는 것인지를 차분히 보여준다. 특히 관심을 둔 부분은 정치 전략으로서의 음모론이다. 실제로 이 책은 음모를 정치적인 것에만 제한하여 주목하고자 한다.


음모론은 "권력을 지닌 둘 이상의 사람들이 뚜렷한 목적을 위해 비밀스러운 계획을 짜서 중요한 결과를 불러올 사건을 일으킨다"라는 구조를 가진다. 우리는 이 조건에 맞는 많은 이야기들을 알고 있다. 인류의 역사는 늘 이런 음모들로 가득하지 않았던가.


저자는 음모론의 기능을 베버의 신정론과 비교하며 설명한다. 신정론은 "왜 선한 사람에게 불행이 닥치는가?"과 같은 불합리한 무의미에 대답하는 역할을 하며 도덕적/인지적/감정적으로 쓸모를 가진다. 고통을 설명하는 이론들, 예컨대 신화, 종교 그리고 각종 이데올로기들은 이러한 쓸모를 공유하는데 음모론 또한 예외는 아니다. 음모론의 기능도 이 도덕적/인지적/감정적 쓸모에 기반한다.


음모론은 오랫동안 현상 유지, 지배, 통치의 기능으로 주목받았다. 이른바 통치의 음모론이다. 하지만 저항의 음모론이 가진 기능도 무기와 같다. 저항의 음모론은 고통의 원인을 간명하게 설명하고 나쁜 놈이 누군지를 지목하고 분노를 해소한다. 또한 사악한 것을 제거할 당위도 주기 때문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할 수도 있다.

(음모론은) 좌우를 막론하고 또 지배하는 자나 지배당하는 자 모두에게 쓸모가 있다. 권력 유지에 쓰일 수 있는 것처럼, 저항을 위해서도 활용된다. 나중에 자세히 다룰 것이지만 먼저 말해두자면, 음모론은 강자의 지배를 위한 도구이기도 하지만 권력의 변화를 끌어낼 수 있는 "약자의 무기 a weapon of weak"이기도 하다.
간추려 말하면, 매력과 민주적 특성 때문에 음모론은 정치 영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 결과는 간명한 세계 이익이다. 음모의 세상에는 두 진영만이 존재한다. 적과 우리 편, 나쁜 놈과 좋은 놈. 31p


저자는 르상티망이 음모론과 밀접히 결합되며 그것의 사회적 뿌리는 지위 불안이라고 설명한다. 르상티망은 자기보다 나은 형편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막연한 분노를 말한다. 내가 예전에 누리던 것을 빼앗겼다고 느끼거나 사회가 정의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들의 분노. 이런 집합적 르상티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책임자와 죄인을 필사적이고 절실하게 찾는다(183p)". 나에게 이런 고통을 준 부정의의 이름을 찾지 못하면 그 분노는 출구를 찾기 어렵다. 그리고 그 분노는 사회 불안의 원인이 되기도 하고 권력을 흔드는 약자의 무기가 되기도 한다.


통치의 수단으로써 건 약자의 무기로써건 간에 정치 전략으로서 음모론의 유혹은 강렬하다. 또한 상대적으로 성공하기 쉬운 전략처럼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음모론을 정치 전략으로 채택함으로써 추가로 지불해야 할 비용에 대해서 경고한다. '민주주의의 파괴'와 '책임의 위기'가 그것이다. 생각 없이 음모론을 소비하며 분노하다 떠올리면 아프게 남을 얘기다. '나쁜 놈에 대한 분노' 뒤에 황폐함만이 남는 기억은 이미 충분하다.

복잡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지친 사람들은 단순하고 확실한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한 번 믿게 된 바를 쉽게 포기하지 않으려 한다. (...)

악마적 관점을 좇아 '그들'을 단죄함으로써 '우리'를 정화하는 것은 비교적 단순하며 쉬운 해결책이다. 진정으로 어려운 것은 '그들'과 '우리'의 공모 관계를 인정하여 우리의 '정치적 책임'을 따지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구태의연해 보이는 책임윤리가 빛을 발한다. 책임윤리의 세 요소 중 하나인 균형 감각은 사물, 사람(타자)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 및 '우리'와 거리를 두는 것이다. 객관적 시야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것이 확보되어야 '그들'과 공모자인 나 자신과 우리 자신에게 죄와 책임을 물을 수 있다. 233~4p


책을 덮으면서 살면서 들어온 많은 음모론들을 감별할 능력이 생긴 것 같은 착각이 생긴다. 미네르바 스타일로 음모론 하나 거창하게 써서 뿌려보고 싶기도 하다. 그런 장난 같은 생각 뒤에 무책임만 남은 음모론의 씁쓸한 기억들이 하나 둘 떠올랐다.


우리는 늘 무의미한 것들에 고통받고 살아간다. 선택적으로 정보를 흡수하고 그 선택을 통해 우리의 고통을 설명할 신념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신념의 맨얼굴은 때로 무의미만큼 초라하다. 참으로, 구원은 없구나.

 


기억에 남은 문구 인용


악마 만들기의 효과는 희생자 되기의 정당성을 강화하며, 희생자의 강화된 긍정적인 정당성은 악마의 사악함을 극대화한다. 따라서 양 전략은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그것은 일단 희생자-로 느끼는 사람들-를 하나의 공동체로 만든다. (...)
희생자에 매혹된다는 것은 동일시와 인정으로 나타나고, 희생자 혐오는 당사자가 그 일에 책임이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왜 그 시간에 그곳을 갔어? 왜 옷을 그렇게 입었어? 이와 달리 인정과 동일시는 희생자에 매혹된 우리 시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것의 가장 중요한 쓸모는 "전략적 특권"이다. 전챙, 테러, 자연재해, 국가폭력, 큰 사고, 범죄의 희생자는 물질적, 상징적, 도덕적 '보상을 받을 권리'를 부여받는다. 나는 아무런 죄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처참한 상황에 처했습니다. (168~9p)


르상티망은 음모론과 밀접히 결합, 르상티망의 사회적 뿌리는 지위불안이다. .. 자신의 상황이 나빠지고 자신들이 누리던 예전의 이점들을 박탈당했다고 생각하는 사회집단들이 갖게 된 정의롭지 못하다는 느낌, 이것이 모이면서 집합적 르상티망이 생긴다. .. 집합적인 좌절과 실망의 원인을 찾지 못하면, 이들의 삶은 무의미해질 것이다. 과거에는 르상티망이나 시기심이 규범적으로 관리되었다. 유교(칠거지악)나 기독교(7대 죄악) 모두 그랬다. (182~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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