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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Aug 04. 2016

[러시아] 표정 가득한 얼굴들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미술사에 가슴 두근거리던 이십 대 초반에는 온갖 아름다운 것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데 어쩌다가 그 기억을 잊었을까. 뒤통수를 잡아끌 듯 저릿한 느낌을 주는 아름다움에 대한 경험과 기억. 그 시절처럼 다시 설레기 시작한 건 모스크바 트레치아코프 미술관에서였다.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입구

역사적인 이유가 있겠지만 러시아 미술은 그 독자적인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많이 알려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 역사적인 이유로 러시아 역사적인 미술작품들은 대부분 러시아에 있다고 한다. 트레치아코프 미술관은 그러한 러시아 미술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미술관이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것이 안타깝다.


트레치아코프는 19세기의 거부였는데 모스크바시에 자신이 수집한 미술품을 기증한 것이 현재 이 국립미술관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1900년대 초에 완공되었다는 미술관 외관도 독특한 형식을 자랑하기 때문에 표지판이 제대로 없어도 주변 건물들 사이에서 금방 알아볼 수 있다. 외부에 보이는 것에 비해 내부가 상당히 넓다. 전부 전시되고 있지는 않지만 소장 작품은 15만 점에 이른다고 한다.


표정이 좋다. 시대와 작가, 작품명은 알아보고 있는 중.

상트페테르부르크나 모스크바의 다른 미술관과 박물관도 좋았지만 트레치아코프 미술관은 특히 인상 깊었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대단한 예술적 토대 위의 러시아 미술을 보여주고 있다. 그중 독자적 흐름을 보여주는 18~9세기 미술은 각각의 그림이 하나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듯 풍요롭고 다채로웠다. 지구 상에 가장 위대한 예술인지는 모르겠지만 더 많이 알려지고 사랑받아 마땅한 예술임은 확신한다.


특히 마음에 들었던 건 풍속화나 역사화 속에 있던 희로애락 빛나는 사람들의 얼굴이었다. 평범하고 행복하고 고통스러운 얼굴이 얼마나 많이 있던지, 전시실 하나하나마다 책을 한 권씩 써서 대하소설을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등장인물이 많아도 하나의 영웅이나 성스러운 존재를 바라보지 않으며 시선은 흩어진다. 풍경화 속에 작게 흩어진 얼굴들에도 고집이 있고 자의식이 있다. 그러고 보니 유명한 러시아 소설들에 등장인물이 수없이 많고 끝없이 이야기가 이어지던 기억이 나서 잠시 웃었다.

웃어줘서 고마워요. 할아버지 이름을 꼭 알아올게요.

수많은 얼굴 중에 특히 구석구석 익살스러운 표정들이 많았는데 주로 눈에 담아왔다. 그래도 왠지 잊고 싶지 않아서 사진으로 남긴 두 가지 익살 표정이 있다. 하나는 무슨 맥락에서 튀어나왔는지 알기 어려운 머리 큰 할아버지. 전시의 맥락을 뚝 끊어먹는 장소에 뜬금없이 서 있어서 더 낯설고 웃겼다. 무슨 신화에 나온 건지 무슨 사연이 있는 건지 모르겠지만 어딘지 모르게 익살스러워서 마음에 들있다. 러시아 표기만 있었던 건지 작품명을 남기지 않았던 것을 통탄하며 찾아보는 중이다.


그리고 또 하나가 아래의 Tomboy다. 장난기 어린, 신나 보이는 얼굴. 옷이 흐트러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집중해서 나무토막 위에서 균형을 잡는다. 낙엽만 굴러도 웃음을 터트릴 듯 가벼운 표정에 에너지 넘치는 손놀림. 크게 뛰어오르면 날아갈 수도 있을 것 같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좋아 보인다.

Chizhov Matvei, Tomboy(1873)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붉은 꽃 하얀 꽃 사이에 파란 바지를 입은 한 청년이 앉아있다. 검은 고수머리에 머리장식도 달려있고,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는 비어있는 시선. 해가 지는 건지 하늘도 붉다. 그림의 제목이 Demon이다. 이 그림도 내 발길을 잡아끌어서 한참 바라보다 사진 한 장을 남겼다.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운 종류의 아름다움을 가진, 인상적인 붉음과 푸르름이다.

Vrubel M.A. Demon(1890) 트레치아코프 미술관

사람마다 취향은 다를 수 있지만 이 미술관은 대부분의 사람이 사랑할 수밖에 없다. 고상 떨지 않는 사랑스러운 작품들이 보다 지칠 만큼 많다. 정 미술작품에 관심이 없다면 건물 외관과 내관의 톡특한 우아함을 즐기는 방법도 있다. 모스크바에 방문할 일이 있다면 무조건 시간 내서 꼭 돌아보라고 추천하고 싶은 곳이다. 물론 모스크바는 꼭 둘러봐야 할 곳으로 가득 차 있는 느낌이라 일순위로 밀지는 못하겠다. 성수기에는 보안검색과 티켓팅에 줄 서느라 삼십 분 이상 걸릴 수 있다는 것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더불어 워낙 작품이 많기 때문에 갈 계획이라면 시간을 넉넉히 잡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미술관을 나오면서 수많은 표정들을 마음에 담았다. 어떤 표정들은 시간이 지나도 마음에 오래 남았다. 추운 겨울에 추워하는 아이의 표정 같은 것. 상실에 슬퍼하고 사랑에 기뻐하는 표정, 그리고 그 표정을 담은 낯선 민족의 낯익은 얼굴.


러시아에 대해 갖고 있던 편견은 여행 중에 많이 깨졌지만 러시아 미술에 대한 무지는 그 짧은 시간에 극복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특유의 표현양식과 세속적이고 보편적인 표정들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던 건 아름다움에 관한 한 인류 공통의 공감대가 존재하기 때문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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